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본조사략 (문서 편집) [[분류:고려]][[분류:가야]][[분류:없어진 역사책]][[분류:고려의 도서]][[분류:한국의 역사책]] [include(틀:한국의 전근대 역사서)] [목차] == 개요 == ''''본조사략''''이란 제목을 가진 고려시대 역사서에 관한 문서. '''본조(本朝)'''는 단순히 '우리나라', '우리왕조'란 뜻으로 고유명사는 아니다. 즉 사서의 진 제목은 '''사략''' 뿐이다. 고려시대엔 사략이란 이름을 가진 사서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삼국유사가 인용한 사'''략'''(史'''畧'''), 하나는 공민왕대에 제작된 사'''략'''(史'''略''')이다. 현재는 두 사서 모두 실전되었다. == 史畧 == >가락기찬[* [[일연]]이 인용한 가락기찬은 [[가락국기]]와 동일한 서적으로 추정된다.]에 의하면 "한 가닥의 자줏빛 노끈이 드리워 여섯 개의 둥근 알을 내리니 다섯 개는 여러 고을로 들어가고 한 개가 이 성안에 남았다."라고 하였다. 즉 한 개는 [[수로왕]]이 되고 남은 다섯 개는 다른 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니, [[금관국]]을 다섯 숫자에 꼽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본조사략(本朝史畧)'''에서는 금관국도 함께 꼽아 [[창녕]]이라 함부로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按駕洛記賛云, “垂一紫纓下六圎卵五歸各邑一在兹城.” 則一爲首露王餘五各爲五伽耶之主, 金官不入五數當矣. 而本朝史畧並數金官而濫記昌寕誤. >---- > -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5가야(五伽耶)조 서문 中. [[고려]]시대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서. 공민왕 시기 편찬된 사'''략'''(史'''略''')과는 별개의 사서로 금관국을 제외한 5가야에 대해 쓴 책으로 추정되나 위의 기록과 940년 [[태조(고려)|태조 왕건]]이 5가야의 이름을 고친 기록밖에 실리지 않아서 사서의 성격을 파악하기 어렵다. 삼국유사가 [[충렬왕]]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걸 감안하면 사략은 최소 충렬왕 이전에 제작되었다는 건 확실하다. == 史略 == 서기 [[1357년]], [[공민왕]] 재위 6년차에 제작된 고려의 역사서로, 자주정책을 내세움과 동시에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야침차게 시행한 사업이었다. 공민왕의 [[배향공신]]인 김해후 [[이제현]]이 감독을 맡아 제작했으며 당시엔 '''국사(國史)'''로 불렸다. 고려사 이제현 열전엔 이제현이 국사(사략) 편찬을 시작하자 당시 [[사관(역사)#고려|사관]], [[춘추관]], [[성균관]]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모두 모였다고 한다. 허나 내우외환에 시달렸던 시대라 편찬에 어려움을 겪었고, 제대로 완성시키지 못했다. [[동문선]] 제92권에 수록된 '진고려국사전'과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 역사 기술 방식은 기년체(紀年體)[* 기년체는 달리 편년체로도 불린다.]였다. * 기년(紀年), 전(傳), 지(志) 세 항목이 있었다. * 국왕의 연대기는 기년에, 왕족 및 신료의 일대기는 전에, 고려의 문물은 지에 기록했다. * 이제현은 16대 숙종까지 완성시켰다. * 그를 보조하던 백문보, 이달충이 17대 예종부터 기록을 이어가야했지만 예종, 18대 인종 기년의 초고만 완성시켰을 뿐이다. * 원고는 홍건적의 난을 거치며 사라졌고, 고려사가 편찬되던 시기엔 태조 기년과 기타 일부분만 남아있었다. * 고려사 세가에 이제현의 논평이 수록된 것을 보아 고려사 제작자들이 이제현의 사략을 참고했다. 정도만 알 수 있다. 그래도 제목 말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1번 항목의 사략보단 나은 형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