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현식 (문서 편집)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인 군인, rd1=박현식(군인))] || '''박현식의 역임 직책'''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현대 유니콘스/역대 감독)] [include(틀:LG 트윈스 2군 감독)]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박현식.jpg|width=100%]]}}} || ||<-2> '''{{{+2 박현식}}}[br]朴玄植 | Park Hyungsik''' || ||<|2> '''출생''' ||[[1928년]] [[3월 11일]] || ||[[평안남도]] [[용강군]] [[남포시|진남포]] (현 [[남포시]]) || || '''사망''' ||[[2005년]] [[8월 20일]] (향년 77세)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 '''학력''' ||[[동산고등학교 야구부|동산중학교]] {{{-2 (졸업)}}} || || '''포지션''' ||[[투수]] || || '''투타''' ||[[우투우타]] || || '''소속팀''' ||[[농협 야구단|금융조합연합]][* 現 [[농협]]] (1949)[br][[상무 야구단|육군 야구단]] (1953~1959) [br][[미창 야구단]] [br] 제일은행 야구단 (?~1968년) || || '''지도자'''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 (1982)[br]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대행 (1983) [br] [[LG 트윈스 2군]] 감독 (1990~1991) || [목차] [clearfix] == 소개 == 대한민국의 [[야구인]]. 고향이 [[북한]] 평안남도 용강군 진남포다. 일곱 살 때 인천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의 형제 모두 야구인으로 명성이 높은데, 큰 형인 박현명은 [[한신 타이거스|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 한국인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선수다. 뒷날 [[6.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북한 야구에 관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둘째 형인 박현덕은 전인천군(全仁川軍) 야구팀을 이끌면서 인천 야구에 큰 기여를 했고 지금의 [[동산고등학교 야구부]]를 창설하고 초대 감독을 역임한 인물이다. 박현식은 바로 둘째 형을 따라 [[동산고등학교 야구부|동산고(당시 동산중) 야구부]]에 들어간다. 한 마디로 [[류현진]]의 대선배되겠다. == 선수 시절 == || [[파일:/image/318/2009/05/11/ar_01.jpg]] || [[파일:/image/318/2009/05/11/ar_02.jpg]] || ||<-2> 선수로 활동하던 시절.[* 우측 사진은 1959년 필리핀 리잘 야구장에서 열린 국제군인야구선수권대회에서 아시아인으로는 첫 번째 장외홈런을 날렸고, 그 기록은 구장 담장에 새겨진 기념으로 찍은 것.] || 1940년대 중학야구에서[* 당시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학제 분리되기 전이었다.] [[장태영]], [[김양중(야구)|김양중]]과 함께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투수로 활동한 그는 [[한국실업야구/역사|실업야구]] 진출 후에는 완전히 타자로 전향했다. 실업 무대에서 최고의 타자로서 명성을 떨치면서 타자 1인자로 군림한다. 홈런이 드물던 시대, 유일하게 홈런을 쳐내던 타자였고, [[이영민]]의 뒤를 잇는 강타자였다. 실업 무대에서 20년간 112개의 홈런을 쳤다고 전해진다.[* 실업야구 통산 100홈런 이상을 기록한 네 명의 선수 중 하나다. 나머지 셋은 [[김응용]], [[박영길]], [[김우열]].] == 대표팀 성적 == 현역시절 그의 별명은 '''아시아의 철인'''이었다. 이는 1954년 1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부터 1965년 6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까지 모두 참가해서 아시아 야구연맹이 특별히 그에게 준 공로상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1963년 서울에서 열린 제 5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결승 1차전 동점 홈런을 치면서 한국의 사상 첫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이 때 기념으로 국내 최초로 [[동대문야구장]]에 야간 조명이 설치되었다. 즉 이전까지는 무조건 주간경기만 했다는 이야기. 겨우 야구를 할려고 소중한 전기를 쓸 수 없다던 시대이다.] == 선수 은퇴, 그리고 감독으로 == [[파일:external/www.isportskorea.com/200612221026411801.jpg]] 삼미 감독 시절의 모습. 그 뒤 [[한국실업야구/역사|실업야구]] [[미창 야구단]] - 제일은행 야구단에서 뛰다가 은퇴, 잠시 감독을 지내다가 은행원으로 평범한 삶을 살았다. 지점장까지 오르면서 야구계에서 완전히 멀어지는 듯 싶었는데, 1982년 전격적으로 [[삼미 슈퍼스타즈]]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한다. 이미 현역을 떠난지 오래된 그가 다시 복귀하게 된 이유에는 여러 추측이 있다.[* 참고로 롯데는 장태영 대신 박영길을, 해태는 김양중 대신 김동엽을 초대 감독으로 선임했는데, 장태영과 김양중은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성이 뚜렷하지만 일선 지도자에서 물러난 지 10년 넘게 지난 상태였다.] * 삼미의 전력이 너무 약해서 인천 지역의 유명 지도자들[* 사실상 그 다음 감독인 [[김진영(1935)|김진영]].]이 거부하면서 그에게 돌아갔다는 설. * 막역한 친구인 [[이용일]] [[한국야구위원회|KBO]] 초대 사무총장[* 전 KBO 총재 대행]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는 설. * 삼미그룹 김현철 회장이 적극적으로 영입하려고 노력했고[* 그런데 김현철 회장은 김진영을 감독후보 1순위로 꼽았었다고 한다.], 여기에 주 거래은행인 [[SC제일은행|제일은행]] 은행장의 요청[* 이필선 당시 제일은행장은 그의 [[국민학교]] 동기였고, 사석에서는 서로 반말하면서 담배 피우는 사이였다고 한다.](이라고 쓰고 명령이라고 읽는)이 있었다는 설. 어쨌든 그는 최약체 팀을 이끌고 뭔가 해 보려고 노력했다. [[슈퍼스타 감사용]]에 나오는 그 모습 딱 그대로다. 다음은 고 이종남 기자의 저서에 나오는 삼미와 박현식 감독에 관한 일화. > 프리배팅 시간이었다. 배팅볼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해 아까운 시간만 흘러갔다. > > “에잉, 그렇게 컨트롤이 없어서야 어떡하누. 이리 내놔봐.” > > 박감독은 스스로 마운드에 올라가 프리배팅 볼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몇 개 던지다보니 이번에는 타자 뒤에 쪼그리고 앉은 [[포수]]의 플레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 > “에잉, [[미트질]]을 그 따위로 하면 어떡해? 이리 줘봐.” > > 이번에는 주섬주섬 포수 도구를 챙겨 입고는 포수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몇 개를 받으며 살펴보니 이번에는 타자의 스윙 자세가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다. > > “아니, 그런 식으로 휘두르면 어떡하냔 말이야. 이리 줘봐.” > ㅡ 이종남, <인천야구이야기> 중에서 == 13경기 만의 해고 == 그러나 그렇게 모셔 온 감독을 [[삼미 슈퍼스타즈]]는 불과 13경기 만에 해임한다. 1982년 4월 25일 춘천 야구장에서 열린 [[OB 베어스]]와의 홈경기가 해임 사유였다. 이 경기는 [[삼미그룹]] 회장이자 슈퍼스타즈의 구단주였던 [[김현철#s-6|김현철]] 회장이 춘천까지 찾아와서 직관을 했는데 하필이면 김 회장이 보는 앞에서 8:0으로 앞서던 경기가 11:12으로 뒤집히는 8점차 대역전패 참사가 벌어졌고 결국 그날로 잘렸다.[* 이는 2003년 [[현대 유니콘스|현대]]가 [[KIA 타이거즈|KIA]] 상대로 9점을 뒤집기 전까지 프로 역사상 최다 기록이었다. 그리고 [[2013년]] [[508 대첩|희대의 10점차 역전 드라마]]가 나오면서 이 기록은 또다시 깨진다.] 그 뒤 [[1983년]] '심판위원장 이단 옆차기 사건' 때문에 구속된 [[김진영(1935)|김진영]] 감독을 대신해 잠시 20경기 정도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끈 적은 있었지만[* 자세한 사연은 [[김진영(1935)|김진영]] 참조.] 그것으로 프로 감독과의 인연은 끝났다. == 이후 == || [[파일:phs.jpg|width=100%]] || || [[2005년]] [[7월 16일]], [[KBO 올스타전]] 당시 시구 || KBO 심판위원장과 규칙위원장을 지냈고, 1991년 [[LG 트윈스 2군]] 감독을 끝으로 완전히 야구계에서 은퇴했다. 그 뒤 암으로 투병, 2005년 병마를 안고 [[KBO 올스타전]] 시구를 한 것이 생전에 대중들에게 비추었던 마지막 모습으로 남아 있다. 올스타전이 있고 나서 한 달 뒤에 타계했으며,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청정리 소재 한국전쟁 참전 유공자 묘역인 [[국립영천호국원]]에 안장됐다. == 기타 == 그를 기리기 위해 [[SK 와이번스]]는 초중고 야구 유망주를 대상으로 박현식 타격상을 수상하고 있다.[* 투수는 류완식 투수상이다. 류완식은 박현덕과 함께 전인천군을 이끌던 1940년대 에이스 투수였다.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프로야구]] 한큐(現 [[오릭스 버팔로즈|한큐 브레이브스-오릭스 프랜차이즈]])에서 활약했다.] [각주] [[분류:1928년 출생]][[분류:2005년 사망]][[분류:남포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야구감독]][[분류:감독 대행/야구]][[분류:우완 투수]][[분류:우투우타]][[분류: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역대 감독]][[분류:실향민]][[분류:위암으로 죽은 인물]][[분류:국립영천호국원 안장자]][[분류:1949년 데뷔]][[분류:1968년 은퇴]][[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동산고등학교 출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