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치제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청 황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2545, #00386a 20%, #00386a 80%, #002545)" {{{#FFD700 '''동치제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청의 황자)] ---- [include(틀:역대 청 황태자)]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2545, #00386a 20%, #00386a 80%, #002545); color: #FFD700" '''청 제10대 황제[br]{{{+1 목종 의황제 | 穆宗 毅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1200px-清_佚名_《清穆宗同治皇帝朝服像》.jpg|width=100%]]}}} || ||<|2> '''출생''' ||[[1856년]] [[4월 27일]] || ||청나라 직예성 북경 자금성 저수궁 || ||<|2> '''사망''' ||[[1875년]] [[1월 12일]] (향년 18세) || ||청나라 직예성 북경 자금성 양심전 || || '''능묘''' ||[[혜릉]](惠陵) || ||<|2> '''재위기간''' ||'''{{{#FFD700 제10대 황제}}}''' || ||[[1861년]] [[11월 11일]] ~ [[1875년]] [[1월 12일]] (13년 62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2 '''중국식 :'''}}} 애신각라(愛新覺羅)[br]{{{-2 '''만주어 :'''}}} [[아이신 기오로 가문|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br]{{{-2 '''영문 :'''}}} Aisin-Gioro || || '''휘''' ||{{{-2 '''중국식 :'''}}} 자이춘(載淳)[br]{{{-2 '''만주어 :'''}}} 자이슌(ᡯᠠᡳ ᡧᡠᠨ)[br]{{{-2 '''한국식 독음 :'''}}} 재순 || || '''영문''' ||Tongzhi Emperor || || '''국적''' ||[[청나라]] || || '''부모''' ||부황 [[함풍제|문종 현황제]][br]모후 [[서태후|효흠현황후]] || || '''형제자매''' ||2남 1녀 중 장남 || || '''배우자''' ||[[효철의황후|효철의황후 아로특씨]] || || '''후궁''' ||[[숙신황귀비 부찰씨]], [[공숙황귀비 아로특씨]][br][[헌철황귀비 혁사리씨]], [[돈혜황귀비 서림각라씨]] || || '''신장''' ||[[https://m.blog.naver.com/cytchoi/221858852874|160cm]][*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이다.] || || '''한호''' ||야오닝아 다산 한(ᠶᠣᠣᠨᡳᠩᡤᠠ ᡩᠠᠰᠠᠨ ᡥᠠᠨ᠌) || || '''칸호''' ||부린 자사그치 칸(ᠪᠦᠷᠢᠨ ᠵᠠᠰᠠᠭᠴᠢ ᠬᠠᠭᠠᠨ)[* bürin ǰasaɣči qaɣan. 현대 몽골어로 Бүрэн засагч хаан (Büren Zasagch Khaan)] || || '''묘호''' ||'''[[목종]](穆宗)''' || || '''시호''' ||{{{-2 '''중국식 :'''}}}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 {{{-2 '''만주어 :'''}}} 피링아 후왕디(ᡶᡳᠯᡳᠩᡤᠠ ᡥᡡᠸᠠᠩᡩᡳ) || || '''연호''' ||[[1862년]] ~ [[1875년]][br]{{{-2 '''중국식 :'''}}} [[동치(연호)|동치]](同治)[br]{{{-2 '''만주어 :'''}}} 야오닝아 다산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청나라의 10대 황제이다.''' 청나라 최후의 직계 혈통 황제이자 중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최후의 직계 혈통 황제다. 그의 죽음으로 청나라 황실의 직계 혈통은 단절되었다. 그리고 중국 역사상 아버지로부터 황위를 이어받은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어머니 [[서태후]]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며 아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다보니 사실상 아무런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황제로 불운한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청나라 역대 황제들 중 가장 강한 정통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도광제]]의 실질적 장남인 [[함풍제]](형들이 모두 요절)에게서 외아들로 태어난 점은, 장자상속제와 거리가 멀었던 청나라의 황위계승법을 감안하면 동치제 본인의 강한 정통성을 더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렇기에 동치제의 짧고 불행한 삶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만약 동치제가 천수를 누렸다면[* 58세까지만 산다고 가정해도 [[1915년]]이다. 동갑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939년, [[필리프 페탱]]은 '''1951년'''까지 살았다.], 청나라 말기가 청나라 초기에 비해 지배민족인 만주족이 유교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시기인 만큼 동치제의 강한 정통성이 나름대로 메리트가 되었을 것이다. 그의 시기 청나라는 [[백련교도의 난]],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등 이미 수많은 국난들을 거치며 망해가고 있는 국가였다. 특히 [[제2차 아편전쟁]] 때에는 서구 침략군들이 수도 [[베이징]]까지 약탈하며 위신이 땅에 떨어진 상태였고, 함풍제는 [[피서산장]]이 있는 [[청더|승덕]]으로 튀어 국정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시름시름하다 죽은 후였다. 이후 함풍제의 아내인 [[서태후]]가 권력을 잡고 뒤에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다. 다만 동치제와 광서제 전반기는 일시적으로 국력이 되살아났던 시기였던지라 그나마 청나라가 마지막으로 힘을 썼던 시기였기는 했다. == 즉위 후 == 5세라는 워낙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에 즉위 직후에는 [[함풍제]]의 유언에 의해 숙순을 비롯한 찬양보정팔대신이 섭정을 하였다. [[함풍제]]는 이들과 태후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모든 성지는 어상과 동도당이라는 도장을 찍어야만 효력을 가진다라고 하여 [[동태후]]와 당시 황태자인 재순에게 각각 주었다. 그러나 보정팔대신과 황태후 간에 대립이 심해지고 베이징에 남은 재경대신과 열하에 있는 고명대신 간에 불화로 인하여 [[기상정변]]이 발발하여 삼촌인 공친왕의 도움을 받아 [[함풍제]]의 정식 부인인 [[동태후]]와 생모인 [[서태후]]가 공동 섭정했다. 사실상 실권은 대부분이 어머니 [[서태후]]에게 있었다고 하지만 동태후가 서태후보다 황실에서의 서열이 더 높아 이로 인한 갈등이 있었기에[* 사실 동태후는 온화한 성격이라 권력욕이 강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동태후가 아예 안 나선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서태후의 말에 동의한 편이었다지만 간혹 두 태후는 충돌했다.] 동치제 즉위 초기의 청나라는 혼란스러운 편이었다고 한다. 또한 두 태후의 갈등은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라 동치제 양육 방식 문제도 끼여 있었다. 동치제 본인은 냉정하고 엄격했던 친어머니보다 어리광을 받아주고 절대 혼을 내지 않고 따뜻한 성격의 동태후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이것은 모자간의 사이가 나빠지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물론 서태후는 자신의 유일한 자식인 동치제를 자식으로서는 많이 생각해주었기에 광서제와 효철의황후에게 했던 것 같은 악랄한 핍박까지는 하지 않았다. 게다가 [[서태후]]가 그의 아내 [[효철의황후]](孝哲毅皇后 阿魯特氏)를 싫어하자, 서태후와 동치제 사이의 거리는 갈수록 멀어져만 갔다. 참고로 안타깝게도 효철의황후 역시 불운했다. 그녀의 아버지 알루터 초치(阿魯特 崇綺)는 동치 4년(1865년)에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장원급제한 [[몽골인]]이었다. 이후 벼슬이 이부상서에 이르렀으며, 동치 11년에는 국구까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출세엔 동태후의 입김이 영향을 미친 거였고, 애초에 시어머니 서태후는 며느리 효철의황후를 싫어했기 때문에[* 효철황후의 생모가 정친왕 단화(鄭親王 端華)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정친왕 단화의 처는 동태후의 고모이기도 하다. 정친왕 단화와 그의 아우 숙순(肅順)은 서태후가 정권을 잡기 전 최대의 정적이었고, 서태후의 권력독점을 저지하였기에 서태후가 그들을 증오했다. 정친왕 단화와 숙순을 제거한 신유정변 이후에서야 서태후는 온전히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능력과 별개로 초치 역시 서태후의 미움을 샀다. 결국 초치는 추탈되었으며, 효철의황후는 동치제의 요절 이후 동치제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는데도 서태후의 핍박을 받아 거의 유폐된 상태에서 지내게 된다. 그녀는 얼마 후에 금조각을 삼켜서 자살하는데,[* 광서제의 후궁인 진비와 달리 서태후가 죽이지 않은 것은 정실 황후인데다 임신을 하였고 동태후가 살아있었고 반목을 겪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신 중에 금조각으로 자살을 할 정도면 서태후의 핍박이 상상 그 이상으로 심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100년도 되지 않아 군벌 [[쑨뎬잉]] (孫殿英)이 묘를 도굴하여 금조각을 찾기 위해 시체 복부를 갈라 내장을 헤집는 만행을 저질렀다. === 양무운동 === 이 시기 청나라는 [[양무운동]]이란 개혁을 추진한다. 우선 1861년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 조선의 통리기무아문의 모델이기도 했다.]이 설치됐는데, 이로서 청나라는 오랜 사대 외교 노선을 공식 포기하고 적어도 서양에 대해서는 '대등한 외교 관계'를 인정하게 된다. 또한 서구의 조선 기술을 들여와 [[명나라]] 시기 이후 거의 진전이 없던 중국의 군함을 발전시키려 노력하였고, 증기기관을 수입하여 나름대로 산업화를 시도해보았다. 주로 1860년대에는 강남기기제조총국, 금릉기기국, 복주선정국 등을 세워 군선과 무기들을 자체제작하였으며, 국비를 들여 외국에 고위급 자제들을 유학까지 보냈다. 70년대에는 해군 양성과 기술자 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동치제 사후인 80년대에는 산업의 근대화에 온 힘을 쏟았다. 양무운동은 이같은 노력들 덕분에 나름대로 성과도 생각보다 괜찮았으나, 개혁파 관료들이 통일되지 못하고 각기 따로따로 개혁을 진행했기에 옆나라 일본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보수파들이 워낙 굳건하게 버티며 개혁을 반대하고 나서며 개혁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아무튼 동치제 연간에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의 기치 아래[* 이 슬로건 역시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에 영향을 미쳤다.] 이른바 '양무 운동'으로 알려진 중국식 근대 개혁이 진행되었다. 물론 결과는 다 알다시피 1894년 -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증명되는 실패한 개혁이었지만. 그래도 이때가 청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그나마 숨을 조금 돌릴 수 있었던 시간이었던지라[* 태평천국을 무너뜨리며 강남을 다시 평정하였으며, 러시아와의 국경도 확정하였고 서양도 그나마 덜 청나라에 간섭했다.] '동치 중흥'이라 불리기도 한다. 한편 동치제 시기의 청나라는 1864년에 [[태평천국]]이 장악하고 있던 [[난징]]을 함락했다. 그리고 태평천국의 [[천왕]] [[홍수전]](洪秀全)이 자결하면서[* 단, 잔당은 1866년까지 활동했다.] 겨우 [[강남(중국)|강남]]을 평정하고, 청 정부는 일단 한숨을 돌렸다. 동시에 태평청국 봉기를 진압하면서 성장한 향신(鄕紳) 출신 의병장들인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 등 또한 공친왕(恭親王)[* 함풍제의 동생. 즉, 동치제의 삼촌이다. 이름은 아이신기오로 이힌(愛新覺羅 奕訢). 베이징 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동치제의 즉위 직후 서태후와 손을 잡고 이친왕 재원(怡親王 載垣), 정친왕 단화(鄭親王 端華), 숙순(肅順) 등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으나 이후 경계를 받아 1865년에는 의정당 대신에서 물러나면서,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의 개혁에 동참하게 된다. 청나라가 그나마 개혁의 모양새라도 낼 수 있었던 것은 동치제 연간 동안에 '''유럽이 그나마 좀 덜 찝적거렸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서구 열강들은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년 ~ 1871년) 등으로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이미 함풍제 시대에 이권을 나름 두둑히 챙겨놨었다.([[러시아]]도 1860년에 [[연해주]]를 얻는 선에서 만족한 상황.) 하지만 동치제가 죽을 무렵엔 그런 불안한 평화도 흔들리게 되었다. === 죽음 === 동치제는 성년에 가까워지자 황제로서 친정을 하기 위해 어머니에게서 실권을 가져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이 [[서태후]]가 그의 아내 [[효철의황후]] 알루터씨(孝哲毅皇后 阿魯特氏)를 싫어했기에 이로 인한 갈등이 발생했고, 이 탓에 정무에 흥미가 사라진 동치제는 유흥과 색에만 열중하다가 [[천연두]]로 인해 만 18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일설에는 열병으로 죽었다고도 하고, 실권을 가져오려다 실패한 후 어머니 서태후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아들을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하자 실의에 빠져 [[집창촌]]을 돌아다니다가 [[매독]]에 걸려 죽었다고도 한다.[* 이 내용은 [[마오쩌둥]]의 [[주치의]]였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리즈수이가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혔다. 리즈수이의 조상이 동치제를 치료한 황실 어의였는데, 동치제가 유곽을 즐겨 다니면서 창녀들과 음란한 놀이를 즐기다가 매독에 걸렸다고 말하자 서태후가 분노하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고 한다. 청나라 최후의 환관 중 하나였던 신슈밍이 지은 책 자금성, 최후의 환관들에서는 동치제가 매일 밤마다 환관들이 입는 평상복을 입고 심복으로 부릴 환관 하나와 함께 유곽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에 환관 중 하나가 그러지 말라고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환관들은 이 소식을 [[공친왕]]에게 알렸고, 공친왕 역시 유곽에 드나드는 것은 황제가 할 일이 아니라고 했으나 동치제는 '''"네 장남'''(공친왕의 장남은 연극 관람 등 노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단순 극놀이 보면서 노는 것과 유곽이 같은 레벨은 아니지만.)'''이나 똑바로 관리해라"'''고 일갈하고는 무시했다고. 세간에 병명이 천연두로 알려진 것은 어의가 차마 황제가 성병에 걸렸다고 고하지 못하여(....) 우물쭈물하다 천연두라고 둘러댄 탓이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죽었다고 한다. 당시 청나라의 야사에 의하면 동치제는 1류 유곽에 가면 고관대작이나 부자들이 자기를 알아보고 소문을 낼까봐, 2류 유곽에 가면 중하급 관리들이 자기를 알아보고 소문을 낼까봐 일부러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3류 유곽에 자주 들렀다고 한다(...)[[https://m.blog.daum.net/shanghaicrab/16157674|#]] 당연하지만 3류 유곽일수록 허름하고 질도 안 좋아서 성병 노출 위험도 커진다.] 동치제가 후사를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안그래도 불안정한 청 조정에는 비상이 걸렸다. 결국 당시 황실 최고 어른이었던 [[효정현황후|동태후]]와 서태후는 동치제의 3살짜리 사촌인 애신각라 재첨을 황제로 올렸으며, 이가 바로 [[광서제]]이다. == 기타 == 한편, 그 당시 [[조선]]은 1863년 26대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등극, [[흥선대원군]]에 의해 10년 간 섭정 통치가 진행되었다. 동치제가 죽을 무렵(1874년)은 고종이 친정을 선포(1873년)하면서 [[명성황후]] 민씨의 세도 정치가 막을 올린 시기였다. 또한 [[운요호 사건]](1875년), [[강화도 조약]] 체결(1876년)도 멀지 않았다. 결국 동양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조선도 나라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또한 [[일본]]은 [[메이지 덴노]]의 등극과 함께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면서 근대 국가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일본의 제국주의 경향도 점차 심해져 동치제 연간 동안 명목상 청나라와 일본의 동시 번국이었던 [[류큐 왕국]]을 완벽한 지배하에 두었으며[* 사실 청나라의 번국이란 것도 지극히 형식적인 것이었고, 이미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여하간 류큐는 1872년 일본의 번이 되었고, 1879년엔 강제로 합병당한다.], 동치제가 죽던 1874년에는 [[대만]]에도 군사를 파병하여 찝적거리기도 했다. 20년 뒤에 일어날 충돌의 전주곡은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청나라에 의해 [[실록]]이 편찬된 마지막 청 황제이기도 하다. 동치제의 실록인 목종실록은 사후 광서제 재위 기간에 편찬되었지만, 다음 황제인 광서제의 실록인 덕종실록은 청나라에 의해 편찬되지 못하고 청나라 멸망 후 민국시대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목종실록은 왕조시대에 편찬된 실록으로서는 중국의 마지막 실록이 되었다. == 매체에서 == * [[주성치]] 주연의 코미디 영화 [[구품지마관]]에서 배우 황일산(黄一山)이 동치제로 분했다. 봉래루에서 기생 여연을 억지로 취하려다가 협리대신이 나타나자 협리대신에게 들키면 안된다고 포룡성과 함께 숨게 되지만, 포룡성의 기지로 위기에서 벗어난 후 척씨 일가 살인사건의 재심을 허락하고 포룡성을 1품 관직인 팔도순안에 임명하여 재심을 맡게 한다. 근데 막판에 반전으로 [[매독]]으로 죽었음이 드러나서 주인공들을 경악하게 한다. * 1994년 개봉된 영화 <滿清禁宮奇案(만청금궁기안)>[* 한국에서는 <후궁:천년금애>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에서 송본중(宋本中)[* 어머니가 프랑스인인 혼혈인이다.]이라는 배우가 동치제 역으로 나온다. 여기서는 동치제의 사인(死因)이 천연두가 아닌 매독이라는 야사를 따른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청사고)] [[분류:청나라의 황제]][[분류:몽골 카간]][[분류:1856년 출생]][[분류:1875년 사망]][[분류:베이징시 출신 인물]][[분류:천연두로 죽은 인물]][[분류:매독으로 죽은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