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난한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후연 황제)] [include(틀:모용선비/왕사)] || '''[[묘호]]''' ||없음 || || '''[[시호]]''' ||없음 || || '''[[제호]]''' ||창려왕(昌黎王)[* 자칭. 특이하게도 황위를 찬탈해놓고도 제(帝)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유목민족 국가들의 칭호인 선우보다 더 격이 높은 대선우를 칭했고, 대장군으로도 칭했다.] || || '''[[연호]]''' ||청룡(靑龍, 398년) || || '''[[성씨]]''' ||난(蘭) || || '''[[이름|휘]]''' ||한(汗) || || '''생몰년도''' ||? ~ 398년 || || '''재위 기간''' ||398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의 [[오호십육국시대|5호 16국시대]], 16국중 하나인 [[후연]]의 비정통 황제였다. 폐주이기에 [[묘호]]와 [[시호]]는 없다. 제호(帝號)는 창려왕(昌黎王)이었다. 자신의 딸 둘을 모용해(慕容楷)와 [[모용보|열종 혜민제]] 모용보에게 시집보냈으며, 형 난제(蘭堤), 동생 난가난(蘭加難)과 함께 모용씨 황실의 외척으로 [[모용수| 세조 성무제]] 모용수로부터 신임을 받았던 평범한 외척이었다. 용성에 주둔하던 모용회(慕容會)의 반란[* 용성을 포위하고 자신을 태자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398년 혜민제 모용보는 중신들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북위]]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남은 세력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을연(乙連)에 이르렀을 때 단속골(段速骨)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켜 다시 용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난한은 사실 단속골과 한패였다. 5월에 용성으로 돌아온 난한은 혜민제와 그의 태자인 모용책(慕容策)을 시해하고 마침내 자신을 '창려왕'이라 칭한 후 제위에 올랐다. 그의 아들인 난목(蘭穆)은 아버지가 황제가 되자 잠시동안 태자로 책봉되었다. 어째서인지 난한은 자신의 사위이자, 혜민제 모용보의 서장자인 [[모용성]](중종 소무제)만큼은 죽이지 않고 남겨놓았는데, 모용성은 황실 복고를 위해 난한과 그 형제들 사이를 이간질하여 갈라놓았다. 398년 7월 모용성이 정변을 일으키면서 난한은 일족과 함께 목숨을 잃었고, 이후 모용성이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역대 후연 황제)]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황제]][[분류:398년 사망]][[분류:비정통 황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