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학 (문서 편집)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인 전 지식경제부 차관, rd1=김영학(공무원))]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김영학}}}'''[br]'''金永鶴'''}}}}}}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영학 독립운동가.png|width=100%]]}}} || ||<|2> '''출생''' ||[[1877년]] [[2월 10일]] || ||[[황해도]] [[금천군]] 북면 상삼리 조포동[* [[http://kcm.co.kr/person/person_k028.html|#]]][br](현 [[황해남도]] [[봉천군]] 연홍리) || ||<|2> '''사망''' ||[[1932년]] [[12월 16일]] (항년 55세) || ||[[러시아]] [[시베리아]] 이동감옥 || || '''직업''' ||[[목사]] || || '''종교''' ||[[기독교]] {{{-2 ([[개신교]], [[감리회]])}}}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580호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감리회]] [[목사]]로서 [[3.1 운동]]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 생애 == 김영학은 1877년 2월 10일 황해도 금천군 북면 상삼리 조포동(현 황해남도 봉천군 연홍리)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고향 마을에 있던 한문 사숙에서 [[천자문]]과 [[사서삼경]]을 두루 읽었으나, 청년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주색잡기]]에 빠져 방탕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30세 되던 1906년 [[토산군]] 천동면 시변리(현 [[황해북도]] [[토산군]] 토산읍)에 있던 장터를 지나다가 어느 한 무리의 감리회 전도대원으로부터 전도를 받았고, 이에 감화되어 권서인(勸書人:성경과 전도책자를 팔면서 전도하는 사람)으로 감리회에 입교하게 되었다. 그 뒤 1911년 정식으로 [[전도사]]의 직책을 맡게 되었으며, 1914년 감리교 연회에서 집사 목사로 안수를 받아 정식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5년 [[감리교신학대학교|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에는 장로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1917년 [[경기도]] [[경성부]] 광희정(현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광희동)에 있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47&docId=524403&categoryId=46647|수구문교회]]([[수구문|水口門]]敎會)[* 1924년 이후로부터 '광희문교회'로 불리기 시작했다.] 및 수표교교회를 비롯해, 1919년까지 [[평산군|평산]]교회, [[금천군|금천]]교회, [[장연군|장연]]교회, [[철원군|철원]]교회, [[종로구|종로]]교회 등을 전전하며 두루 담임 목사를 맡았다. 그러다가 1919년 초에 [[양양군]] 감리교회에 부임하였고, 양양군 양양면(현 [[양양읍]]) 성내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그리고 그해 양양군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목사로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출옥 후 그해 10월 초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던 [[조종대]]가 소속되어 있던 대한독립애국단에 입단하게 되었으며, 김영학은 강원도단(道團) 산하에 양양군단(郡團)을 결성하고 양양군단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양양군단장으로서 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 및 재정자금의 모집을 주도하였으며, 국내의 조직망을 통해 임시정부 [[연통제]]와 같이 연락망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양양군단을 결성한 후 그는 김형석(金亨錫)을 비롯해 이근옥(李根玉)·이석규(李錫圭)·김연수(金延洙) 등을 양양군단에 가입하도록 하면서 조직확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출처 : 독립유공자 공훈록 7권] 그러나 1920년 1월 대한독립애국단을 본부로 두고 있던 강원도단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김영학 또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 증회,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공갈취재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에 산입)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29&evntId=0034974727&evntdowngbn=Y&indpnId=0000006911&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였으나 1921년 3월 14일 경성복심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29&evntId=0034970951&evntdowngbn=Y&indpnId=0000003392&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공소가 기각되면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798&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4700&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1921년 수형인명부]]에 따르면 당시 주소지는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현 [[황해북도]] [[토산군]] 토산읍)였다.] 결국 수감되었다. 1922년 5월 출옥한 후 그는 가평군 교회에서 시무하다가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1922년 9월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의 조선인 집단거주지인 신한촌(新韓村)으로 파견되는 선교사에 자원하였다. 그리하여 김영학은 신한촌에서 감리회 선교활동 및 교민들을 대상으로한 민중계몽·애국사상 고취 활동에 몰두하였는 한편, 독립운동가 및 항일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다 [[소련 공산당]]에서는 김영학에게 선교활동 중지를 요구했으나 김영학이 듣지 않자, 1929년 [[소련 공산당]]에 체포되어 10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 이동감옥에 투옥되었다. 그 뒤 1932년 12월 16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1996년 10월 9일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안장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일제강점기의 감리회 신자]][[분류:금천군 출신 인물]][[분류:1877년 출생]][[분류:1932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감리교신학대학교 출신]][[분류:옥사한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