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귄터 샤보프스키 (문서 편집) [[분류:독일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 위원]][[분류:1929년 출생]][[분류: 2015년 사망]][[분류: 독일의 남성 정치인]] [[파일:말실수로독일통일.jpg]] Günter Schabowski 이 사진이 그 유명한 [[독일 재통일]]의 시발점이 된 베를린 장벽 붕괴를 촉발시킨 기자회견에서의 사진이다. ([[1929년]] [[1월 4일]]~[[2015년]] [[11월 1일]]) [목차] == 일생 == [[1929년]] [[1월 4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서포메른에서 태어나 [[라이프치히 대학교]][* 당시에는 카를 마르크스 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 노조 기관지의 편집장으로 일하다 [[1952년]]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에 가입하고 [[1978년]]에는 당의 기관지 편집장의 자리까지 오르는, [[동독]]의 관료로서 착실히 경력을 쌓아갔다. [[1981년]]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의 중앙 위원회의 일부가 됨으로서 정치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985년]]에는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의 동베를린의 기관장이자 정치국의 멤버가 되었다. 이렇게 샤보프스키는 평범한 정치인, 정치 저널리스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렇게 큰 특징없는 평범한 정치인의 문서가 왜 만들어졌는지 싶겠지만... == [[1989년]]의 기자회견: [[베를린 장벽]] 붕괴의 도화선 == 이 사람이 이렇게 유명하고 문서가 생길 정도의 인지도를 얻게 된것은 이사람이 치른 [[1989년]]의 한 기자회견 때문이다. 1989년, [[헝가리 민주 공화국|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동유럽 혁명|시민혁명]] 및 서구권과의 국경 완화로 [[철의 장막]]은 무너져내리고 있었고, 수천명의 동독인들이 이미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를 통해 [[서독]]으로 망명한 상태였다. 동독에선 라이프치히에서 촉발된, 통일을 요구하는 시위대는 동독 전역을 휩쓸었고,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영향력과 합세해 당시 동독의 강경파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는 축출된다. 동독 정부는 당대의 상황 속에서 철의 장막을 유지하는게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걸 깨닫고, 동서독간의 국경 완화를 결정한다. 이에 관하여 샤보프스키는 동독 정부를 대표하여 기자회견을 열게 되었다. 본래 이 기자회견에서 알릴 내용은 단순히 동서독간 여행의 허가증 발급 간소화[* 공식적인 이유 없이 개인적인 방문에 대한 허가증 발급도 허가되었다.]와 여권 발급 간소화 뿐이었다. 당대 동독인들이 열망하던 "완벽한 여행 자유화"는 그 어디에도 없었고, 사실상 이름뿐인 변화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한, 이 "여행 자유화"도 그 다음날이 되어 여권 발급소 및 허가증 발급소가 열고 나서야 질서있게 이뤄질 예정이었다. 허나 방금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 기자회견에 참석해야 했던 샤보프스키는 이러한 내용들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였고, 한 이탈리아 기자가 이러한 조치들이 언제부터 발효되냐 묻자 자기가 받았던 종이들 중 하나에 적혀있던 대로 '''즉시, 지체없이 (Sofort, unverzüglich)'''라고 대답해 버렸고[* 사실 이는 그가 읽고 있던 글을 작성한 자가 이를 잘못 적은 것을 수정할 시간이 없어서 각주를 붙어 샤보프스키가 이 문장을 읽지 않게 한것을 인쇄소 직원이 실수로 그 각주를 지워버리는 바람에 샤보프스키가 이를 읽게 되었다. 또한 샤보프스키가 이 글을 제대로 숙지하였다면 문서의 뒷페이지에 여행 자유화 조치들이 다음날 절도있게 이뤄질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거지만 휴가에서 막 돌아온 샤보프스키는 이 문서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였다. 여러모로 우연과 실수들의 연속인 셈이다.] 이는 우리가 아는대로 수많은 동독인들을 거리로, 그리고 장벽으로 이끌어 결국 그날 11월 9일 밤, 중앙위원회에 연락할 길도 없고 성난 군중과 마주하게 된 동독 국경수비대가 국경을 개방하면서 베를린 장벽은 비로소 무너지게 된다. 어찌보면 의도치 않게 [[독일 재통일]]의 주역이 된 셈이다. == 그 후 == 독일이 통일된 이후 1992년부터 1999년 까지 샤보프스키는 로텐부르크 안 데어 풀다의 지역 언론에서 서독 출신 언론인들과 저널리스트로 일했다. 과거 베를린장벽을 넘으려는 동독인 다수를 총격살해한 정책을 한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의 전향적 태도로 혐의에 비하면 낮은 형량이 구형됐다.] 하지만 1999년 12월에 수감되고 나서 10개월후인 2000년 12월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이후 샤보프스키는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인 [[좌파당(독일)|좌파당]]에 대해 비판했다. 2001년 [[기민련]] 출신 정치인 프랑크 슈테펠의 고문을 맡았다. 이후 여러번의 심장마비와 뇌졸중으로 양로원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2015년]] [[11월 1일]] 베를린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사망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86세.[[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8&aid=000357139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