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권오훈(1911) (문서 편집) [[파일:external/people.phinf.naver.net/yonhapnews_30401172.jpg|width=150]] 權五勳 [[1911년]][* 『달서구사(達西區史)』하편 517쪽에는 1910년생, 안동권씨대동세보 14권 388쪽에는 1912년생으로 각각 달리 등재되어 있다.] [[5월 15일]] ~ [[1951년]] [[2월 3일]][* 음력 1950년 12월 27일.] (향년 39세)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안동 권씨|안동]](安東)[* 복야공파(僕射公派) 득중(得中)계 35세 '''오(五)''' 오(悟) 숙(肅) 오(梧) 항렬.], 호는 목원(木園)이다. 이명은 권봉민(權鳳民)이다. == 생애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권오훈(1911).jpg|width=100%]]}}} || || [[양정고등학교(서울)|양정고등보통학교]] 시절 촬영된 사진으로 추정. || 1911년 5월 15일 [[경상북도]] 대구부 인흥면 대곡동(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대곡동(대구)|대곡동]])[*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에서 아버지 권승렬(權承烈, 1887 ~ 1946. 10. 18)과 어머니 [[김해 김씨]](1889 ~ ?. 10 .15)[* 김장수(金章洙)의 딸이다.]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김해 김씨]] 김찬수(金燦洙)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다. 화원공립보통학교(현 대구 화원초등학교), [[양정고등학교(서울)|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대학]] [[정치경제학|정치경제학부]]를 중퇴하였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6200032920300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6-20&officeId=00032&pageNo=3&printNo=1196&publishType=00020|#]] 메이지대학을 중퇴한 뒤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여 1931년 [[중국 국민당]]의 특무조직 [[남의사]]에서 활동한 바 있다. [[8.15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창당에 참여하였고 충청남도지부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는 대구부 [[대봉동]]에 주둔하던 육군 [[제106보병여단|제106보병연대]] 부연대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부연대장 재직 중에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달성군(선거구)|달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전도회 [[김우식(1888)|김우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1월 31일 저녁 7시 30분경, 대구시 남산동 명덕네거리에서 한 부녀자를 희롱하던 신원 미상의 [[주한미군]]을 말리던 중 [[주한미군]] 몇 명이 그가 소지하고 있던 호신용 [[권총]]을 빼앗으려고 [[카빈|카빈총]]으로 그의 복부를 쏘아 맞힌 후 도주하였다.[[http://db.history.go.kr/id/dh_020_1951_01_31_0130|#]] 이 사건으로 권오훈은 시내 해성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중태에 빠졌고, 결국 2월 3일 별세하였다. 당시 경찰의 미지근한 대응으로 범인을 검거하는데 실패했으며 유일한 증거물이었던 피투성이 옷을 가져간 미 8군은 수사 결과를 발표하지도 않았다. 13년이 흐른 후인 1964년에 유가족이 죽음과 관련한 정확한 조사 결과와 피해 보상을 미 국무성과 미 8군에 요청하였고, 국회로부터 '권오훈이 미군 병사에 의해 살해됐다.'는 사실증명서까지 받아 첨부했지만 미 8군은 그 때 증거자료가 모두 없어졌다고 통보해 왔을 뿐이었다. == 유족들의 씁쓸한 후일담 == 피살 후 유가족들은 고통과 분노 속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그의 장남 권혁주(權赫宙, 1937 ~ )는 아버지의 생전 업적과 죽음을 밝혀내는 일에 뛰어들었지만 당시 미국, 한국정부는 끝내 권 씨를 외면했다. 이후 정부가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발족하자 대구 동구청에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한 진상규명 신청서를 접수한 권 씨는 "이름 모를 미군 병사의 만행과 이를 덮어 둔 미국, 한국 정부 때문에 지난 시간을 고통과 분노 속에서 살아왔다."며 "제발 올해 만큼은 과거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눈물지었다. [[http://mnews.imaeil.com/NewestAll/2007012610204044694|#]] 생전 모든 재산을 일제 시대 상해임시정부의 광복군 비밀 자금으로 댔지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정부의 독립운동가 선정에서 조차 제외됐다. 가족들은 대전 [[국가기록원]]까지 찾아가 그의 독립 운동 기록을 찾았지만 관련 서류가 하나도(!) 없었고, 독립 운동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지인들도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는 속 터지는 결말. == 선거이력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 연도 || 선거종류 || 선거구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 경북 달성군[* 제4선거구] ||<|2> [include(틀:무소속)] || 10,869표 (29.22%) || 낙선 (2위) || ||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경북 달성군[* 제6선거구] || '''8,172표 (16.92%)''' || '''당선 (1위)''' || '''초선'''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권오훈, version=7)] [[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제2대 국회의원]][[분류:무소속 국회의원]][[분류:달서구 출신 인물]][[분류:안동 권씨 복야공파]][[분류:1911년 출생]][[분류:1951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살해된 인물]][[분류:총기에 죽은 인물]][[분류:양정고등학교(서울) 출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