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종(당) (문서 편집) [[분류:수당시대/황제]][[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시안시 출신 인물]][[분류:628년 출생]][[분류:683년 사망]] [include(틀:역대 당 황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ece5b6 '''고종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돌궐 가한)] ---- [include(틀:역대 당 황태자)] ---- [include(틀:고구려-당 전쟁)]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8E096, #F4EEB0 20%, #F4EEB0 80%, #E8E096); color: #1e1e1d,#2d2f34" '''{{{#000 돌궐 제14대 가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color: #ece5b6" '''당 제3대 황제[br]{{{+1 고종 홍황제 | 高宗 弘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당고종초상.jpg|width=100%]]}}} || ||<|2> '''출생''' ||[[628년]] [[7월 21일]]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동궁 여정전[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즉위''' ||[[649년]] [[7월 15일]]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황궁[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사망''' ||[[683년]] [[12월 27일]] (향년 55세) || ||[[당나라|당]] [[허난성|동도]] [[뤄양시|낙양]] 낙양궁 정관전[br](現 [[허난성]] [[뤄양시]]) || || '''능묘''' ||[[건릉]](乾陵) || ||<|4> '''재위기간''' ||'''{{{#ece5b6 당의 황태자}}}''' || ||[[643년]] [[4월 30일]] ~ [[649년]] [[7월 15일]] || ||'''{{{#ece5b6 제3대 황제}}}'''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4EEB0; font-size: .9em" {{{#1e1e1d,#2d2f34 '''제14대 가한'''}}}}}} || ||[[649년]] [[7월 15일]] ~ [[683년]] [[12월 27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이(성씨)|농서 이씨]] || || '''휘''' ||치(治) || || '''부모''' ||부황 [[태종(당)|태종]][br]모후 [[문덕황후 장손씨|문덕황후]] || || '''형제자매''' ||14남 21녀 중 9남 || || '''배우자''' ||정실 [[폐후 왕씨(당고종)|폐후 왕씨]], [[측천무후|측천황후]][br]후궁 [[숙비 소씨]] || || '''자녀''' ||8남 4녀 || || '''종교''' ||[[불교]] || || '''아명''' ||치노(雉奴) || || '''자''' ||위선(爲善) || || '''작호''' ||진왕(晉王) || || '''묘호''' ||'''[[고종]](高宗)''' || || '''시호''' ||천황대성대홍효황제[br](天皇[* 일본 [[천황]](天皇) 칭호의 어원이라는 학설이 있다.]大聖大弘孝皇帝)[* [br][[683년]] 천황대제(天皇大帝)[br][[754년]] 천황대성대홍효황제(天皇大聖大弘孝皇帝)] || || '''한호''' ||천가한(天可汗) || || '''연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영휘]](永徽, [[650년]] ~ [[655년]])[* 비교적 무난했던 그의 치세를 [[태종(당)|아버지]]의 [[정관지치|정관의 치]]에 이은 '''영휘의 치'''라고도 한다.][br]현경(顯慶, [[656년]] ~ [[661년]])[br]용삭(龍朔, [[661년]] ~ [[663년]])[br]인덕(麟德, [[664년]] ~ [[665년]])[br]건봉(乾封, [[666년]] ~ [[668년]])[br]총장(總章, [[668년]] ~ [[670년]])[br][[함형]](咸亨, [[670년]] ~ [[674년]])[br][[상원(연호)|상원]](上元, [[674년]] ~ [[676년]])[br]의봉(儀鳳, [[676년]] ~ [[679년]])[br]조로(調露, [[679년]] ~ [[680년]])[br]영륭(永隆, [[680년]] ~ [[681년]])[br]개요(開耀, [[681년]] ~ [[682년]])[br]영순(永淳, [[682년]] ~ [[683년]])[br]홍도(弘道, [[683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제3대 [[황제]]. [[태종(당)|당태종]] 이세민의 9남이며 휘는 치(治)였다. 모친은 [[문덕황후 장손씨]]로, 그녀의 3남이었다. 시호는 천황대성대홍효황제(天皇大聖大弘孝皇帝)로, 줄여서 홍황제(弘皇帝)이다. '''[[당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 [[고구려]], [[백제]], [[신라]], [[토번]], [[돌궐]], [[일본|왜]]]와 전쟁을 벌인 인물이었다.''' == 생애 == === 황태자가 되다 === 이치는 적자로서는 3남이었지만, 서자까지 다 포함하자면 [[태종(당)|태종]]의 9남이었는데 이로 인해 원래는 황위 계승과 상당히 먼 입장이었다. 그러나 [[위징]] 사후 태자인 [[이승건]]의 위치가 불안정해지고[* 태종은 신임하는 신하인 위징을 태자 이승건 옆에 붙여서 훈육함과 동시에 지위가 굳건함을 대내외에 보이려 했으나 얼마 못 가 위징이 병사했다.] 위왕 이태가 태종의 총애를 받으며 서로 다투기 시작하면서 후계자 문제가 불거졌고, 결국 계승권이 위태롭다고 여긴 태자 이승건이 한왕 [[이원창]], 재상 [[후군집]]과 손을 잡고 정변을 일으켜 황위에 오르려다가 발각되어 이원창과 후군집은 사사되고 이승건은 폐서인되는 일이 일어나면서 일약 이치가 황위 계승의 물망에 오르게 되었다. 태종은 처음에는 위왕 이태를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태종의 외척이자 유력한 사족이었던 [[장손무기]]가 반대했고, 여기에 위왕 이태가 새로운 경쟁자가 된 진왕 이치를 협박하는 일이 발각되면서 자신의 사후에도 자식들 간의 다툼이 없기를 바랐던 태종의 마음이 변하게 되었다.[* 나중에 시중드는 신하에게 "이태를 세우면 이승건과 이치도 모두 온전하지 못할 것이고 이치를 세우면 이승건과 이태는 모두 걱정이 없을 것"이라는 이유를 대었다. 태종 본인도 황제가 되기 위해 형제를 죽여야 했던 [[트라우마]]에 시달리던터라 최소한 자신의 후대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자 서자이나 가장 뛰어난 오왕 [[이각(오왕)|이각]][* 폭군 [[양제(수)|수양제]]의 서출 황녀가 낳은 아들이었으므로 수 황실인 홍농 양씨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을 태자로 삼으려고 했지만 장손무기가 매우 격렬하게 반대해서 자신과 친한 조카를 옹립하고자 했고 결국 태종은 이각 대신 이치를 후계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태종의 실책으로 꼽히는 것이다.] 이후 태종은 [[자살]]쇼를 통해 인자하고 효성스럽다는 이유를 들어 정관 18년(644년) 이치를 황태자로 세웠다. 태종은 어떤 의미로는 어쩔 수 없이 이치를 세운 꼴이었고 황태자가 된 시점에서 아직 20살도 안 된 데다가 직전까지 계승 순위에서 상당히 먼 처지였다 보니 신경을 써서 태자 이치를 [[교육]]시켰다. 유력한 중신들을 황태자 주변에 붙였는데 장손무기를 태자사보, [[방현령]]을 태부, 소우를 태보, [[이세적|이적]]을 첨사, 이대량을 우위솔, [[우지녕]]과 고계보를 우서자, [[장행성]]을 소첨사, [[저수량]]을 빈객으로 삼았다. 태반이 공신들이자 재상급인 인재들을 황태자 주변에 붙임으로써 그 지위가 굳건하다는 것을 대내외에 드러내 보인 것이다. 여기에 태종 자신과 항상 동행하게 하면서 국정에 관해 의견을 말하게 했고, 자신의 통치 경험을 《제범》이라는 책으로 엮어서 이치로 하여금 학습하게 하는 등 [[황제]] 속성 교육을 시켜 자신의 사후를 대비하게 했는데 이 시기에 이치가 재인 무조, 즉 훗날의 [[측천무후]]와 만난 것으로 보인다. 태종은 붕어시에 장손무기와 저수량을 불러 고명대신으로 삼고 태자 이치에게 유언으로 >"장손무기와 저수량이 있으면 너는 천하를 걱정하지 말라." 라는 말을 남겼다. 아무래도 그렇게 속성 교육을 했다지만 이치가 여전히 못 미더웠던 모양이다. === 황제로서의 치세 === 649년에 즉위한 젊은 황제 고종은 아버지에 비해 못했지만 그래도 유능하게 대제국을 잘 꾸려나간 것으로 평가받는다.[* 전대인 당태종이랑 후대의 측천무후가 너무 나라를 잘 다스렸기에 까인다고 보면 된다. 고종은 당대의 군주들 중 유능한 축(5~7위)에 속한다.] 그러나 [[측천무후]]를 후원해 그녀가 국정에 참여하고 공신들을 숙청하며 실권을 잡는 데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는 점에서는 좀 까이기도 한다. ==== 황후 왕씨 폐위와 [[측천무후|새 황후]] 책봉 ==== 고종은 기존의 황태자비였던 왕씨를 황후로 올렸으나 곧 관계가 소원해지고 [[숙비 소씨]]를 총애하게 되었다. 이에 황후 왕씨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폐위하려 했으나 내로라하는 명문 집안이었던[* 서위의 대장 왕사성의 현손이자, 당태종의 고모인 동안공주(同安公主)의 손녀였다.] 황후 왕씨를 장손무기와 저수량을 비롯한 좌명대신들이 옹호하여 분쟁이 심각해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고종은 감업사에 자주 들러 관례대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 무미랑(훗날의 [[측천무후]])를 총애하게 되었고, 652년 결국 무미랑에게서 아들 [[이홍(당)|이홍]]을 얻었다.[* 문제는 측천무후가 [[태종(당)|태종]]의 [[후궁]]이었으므로 고종에게는 의붓어머니 뻘이 된다는 것이지만, [[당나라]]가 [[한족]] 국가일지라도 황실은 북방 유목민 혼혈이라 [[형사취수제]] 개념으로 봐야 한다.] 다음 해인 653년 황후 왕씨와 숙비 소씨 간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게 되었다. 황후 왕씨는 고종의 숙비 소씨 총애를 막기 위해 감업사의 무미랑을 다시 황궁에 들여 정2품 소의(昭儀)에 책봉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황후 왕씨의 생각대로 고종의 총애가 숙비 소씨에게서 멀어졌지만, 소의 무씨가 고종을 독점하게 되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되어 황후는 소의 무씨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소의 무씨는 황후와 숙비 소씨에게서 배척을 받는 후궁들과 빈천한 가문 출신 서족들, 장손무기 및 저수량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세적|이적]]까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세력을 구축했다. 결국 치열한 정치 투쟁 끝에 소의 무씨의 딸 [[안정공주]]가 사망하는 사건[* [[측천무후]]가 [[안정공주]]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생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망했다. 이를 측천무후와 연결된 파벌은 황후 왕씨가 다녀가서 죽인 것으로 몰아갔으며 이것이 승리의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측천무후]]가 정쟁에서 이기기 위해 안정공주를 베개로 눌러서 죽였다는 야사가 있다.]이 벌어지면서 공신들의 수장격이던 저수량과 장손무기가 물러나고 황후 왕씨와 숙비 소씨가 폐서인되어 자결함으로써 무씨가 황후로 책봉되었다. 직후 무후는 황태자(皇太子)였던 [[이충(당나라)|이충]](李忠, 643~664)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맏이인 이홍을 황태자 자리에 올렸다. 이러한 황후 폐위와 책봉 과정은 전통적으로 정권을 잡고 있었던 [[관롱집단]](사족)[* 북주, 수, 당을 건국한 핵심 그룹은 '''무천진(武川鎭) 군벌'''이라고 불린다. 무천진은 북위 말기 [[육진의 난]]이 벌어질 때 6진 중 하나인데, [[북주]]의 실질적인 건국자였던 우문태를 따라 이 지역 [[선비족]]들이 관중으로 이동하여 [[서위]] 군부의 핵심 집단이 되었다. 우문태의 일족인 우문씨, 수문제 양견의 일족인 홍농 양씨, 그 아내인 문헌황후 독고씨의 일족인 독고씨, [[수당교체기]]때 최대 세력이었던 이밀의 이씨, 당고조 이연의 일족인 농서 이씨, 당태종 이세민의 황후인 문덕황후 장손씨의 일족인 장손씨가 모조리 이 집단에 속했다. 이들은 8개의 주국대장군, 12개의 대장군직을 대대로 세습하는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전의 산동, 관중 일대의 전통적인 한족 [[문벌귀족(중국)|문벌귀족]]과는 대비되는 '신귀족' 집단을 형성해 황실도 이 집단의 주도권을 잡기 힘들 정도였다.]과 이들에게 차별 대우를 받았던 서족 세력 간 정치 투쟁으로 보는 것이 다수설이며 측천무후의 승리는 관롱집단의 정치적 패배와 몰락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이런 장면들을 주도한 인물은 측천무후가 아니라 고종 자신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측천무후에게는 어느 정도 용인이 되었지만 선제 태종의 측실로 이미 출가했다가 환궁했다는 약점도 존재했고 '''고작해야 당대에 출세한 개국공신이 전부'''라 격이 낮은 가문이라는 한계가 존재했다.[* 이 시대에 '가문 좀 대단하네.' 하려면 못해도 후한 말부터 거진 수백 년 이상 고위직을 역임해야 했다. 이게 얼마나 심했는지 후대의 [[문종(당)|당 문종]]이 '''"우리 가문이 200년간 황제를 했는데도 최고 가문이 아니다."라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러니 고작 개국공신 정도로는 단순한 벼락 출세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때문에 [[측천무후]]는 고종의 총애를 제외한 지지 기반이 전혀 없었으므로 황실 내에서 자기 기반 다지기에도 급급했다. 《이위공문대》를 보면 태종 본인도 특히 장손무기를 상당히 부담스럽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 대외 정책 ==== 고종은 태종의 뒤를 이어 '''팽창주의적, 공격적 대외 정책'''을 추구하여 '''의외로 [[정복군주]]'''였다. [[측천무후]]의 포스 때문인지 [[공처가]]의 이미지도 강하고 병약했다는 점 때문에 소극적인 대외 정책을 추구했을 것 같지만, 실상은 본인이 친정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상당히 호전적인 [[전쟁광]]이란 생각마저 들 정도로''' 원정을 많이 했다. 이러한 원정은 동쪽에서는 신라와 손을 잡고 아버지 [[태종(당)|당태종]]이 정복에 실패했던 [[고구려]]를 [[평양성 전투(668년)|멸망시키는 등]]의 성과를 냈지만 [[나당전쟁]]에서 패배해 목적한 바를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고 한반도에 국력을 집중하느라 서쪽 [[토번]]의 [[가르친링]]의 성장을 제때 견제하지 못해 수도 [[시안시|장안]]에서 가까운 지역까지 위협받는 처지가 되었다. 애초에 토번은 당나라가 키운 감이 없지 않은데 토번을 제때에 견제했다면 초기에 몰락시킬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으니 후대에 골치거리를 남기게 된 셈이었다. ===== [[돌궐]]과의 전쟁 ===== 고종은 즉위 직후부터 돌궐 세력과 지속적인 전쟁을 벌였다. 태종에 의해 몰락했던 동돌궐은 [[설연타]]족의 패망으로 인한 공백을 노려 거비가한이 재기를 노렸고, 세력을 유지하던 서돌궐은 이를 후원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즉위 직후인 650년 우효위랑장 고간이 거비가한을 추적, 생포한 다음 그 부족을 욱독군산에 이주시키고 관리하여 동돌궐의 재기를 늦추었다. 이후 657년 좌둔위장군 [[소정방]]이 전격적인 진공 작전을 펼쳐 서돌궐의 사발라가한 아사나하로를 공격, 100,000여 명의 서돌궐군을 격파하고, 종속 부족들의 지원을 받으며 군사력을 증강해 결국 [[신강]] 지역의 버얼타라 강{쌍하(雙河)}에서 사발라가한을 사로잡고 서돌궐을 평정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658년에는 [[쿠차]]에 있었던 구자국을 점령하고, 여기를 '''안서도호부'''로 삼은 후, 재차 진격하여 659년 소그드와 페르가나에 도독부를 설치하면서 [[파미르 고원]]에 미치는 역대 최대 강역에 도달했다.[* 이후 [[당현종]] 때 [[고선지]]에 의해 더 서진하기는 한다.] 하지만 이들 도독부는 665년에 폐지되었다. 이후 한동안 당나라는 돌궐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679년 동돌궐은 아사나니숙을 가한으로 옹립하며 재봉기했다. 이에 당고종은 배행검을 정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300,000명의 대군을 동원해 일시적으로 진압했다. 아사나복념이 아사나니숙에게 호응해 또다시 들고 일어났으나 당나라는 이간계를 통해 이를 다시 진압했다. 그러나 서돌궐 또한 682년에 들고 일어났고 이는 왕방익에 의해 일시적으로 진압되었지만 고종 재위 말기, [[힐질리시가한]](일테리시 카간)에 의해 돌궐 제2제국이 건국되었고, 당나라의 북변을 크게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당고종의 뒤를 이어 당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후대 황제들 역시 다시 강성해진 돌궐 제2제국에 골머리를 앓았으며 북방을 유린당했다. ===== [[백제]]를 멸망시키다 ===== 처음에는 부황의 '''정관의 치'''를 이끌었던 유능한 신하들을 옆에 두고 대외적으로 공격적인 입장을 취했다. 특히 [[백제]]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이는 645년 제1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 보인 백제의 태도 때문이었다. 본래 백제는 [[당나라]] 건국 직후부터 대당 외교에 대단히 공을 들였으며, 이것이 [[고구려]]를 견제하려던 당나라의 의도와 맞아떨어져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전 작업 아래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대대적으로 [[신라]]의 [[한강]] 유역을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 당-백제 간 외교관계 파탄의 시작이었다.(643) 이후 당태종의 경고에 따라 [[의자왕]]은 스스로 군사를 물려야만 했다. 그리고 645년 당의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할 당시, 백제와 신라 양쪽 모두에 고구려 공격을 지원할 것을 요청했는데 여기서 신라는 당태종의 요청에 응해 원군 30,000명을 보냈지만, 함께 고구려를 치기로 했던 백제는 원군을 보내지 않고 오히려 신라를 공격하여 644년 [[김유신]]에게 빼앗긴 7개 성을 되찾았다. 즉 백제가 당을 돕는 신라를 공격→고구려 정복에도 간접적으로 걸림돌이 된 셈이므로 태종이 백제에 분노해, 이 사건 이후 백제는 태종이 죽을 때까지 사신을 보내지 못했으며, 고종이 즉위한 후인 650년이 되어서야 관계 정상화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당나라는 [[김춘추]]의 언변에 화답해 외교 파트너를 백제에서 신라로 완전히 교체해 버린 후였다. 이를 증명하듯, 651년에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자 고종은 백제에게 [[신라]]와 화친할 것을 요구했다. 그 화친의 조건은 '신라에게서 뺏은 땅([[대야성]])과 포로들을 모두 돌려줘야 하며, 이를 어길 시 백제를 정벌하겠다'는 것이었고, 의자왕은 당과의 회복 노선에 최선을 다하는 듯 하면서, 고구려를 도와 [[말갈]]과 함께 655년 정월, 신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신라의 한강 지역 33개의 성을 함락시키는 이중적인 행동을 취했다. 이로써 다시 한번 백제는 [[당나라]]와의 외교 노선에서 완벽하게 배제되어버렸다. 거기에 [[백제]] 내부에서 내홍이 발생했는데, 642년 [[의자왕]]이 백제의 귀족들을 대거 쳐내며, 자신의 아들들에게 고위직을 물려주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결국 여기에 불만을 가진 백제의 귀족 세력들이 대거 [[신라]]에게 붙는 상황이 되었다. 655년 10월 [[김유신]]이 좌평 임자와 내통하여 도비천성을 함락시켰다. 또한 당고종 역시 신라와 함께 협공할 것을 계산하며,[* 이쯤 되었을 때는 당이 [[신라]]에 진법이나 무기 등을 전수하여, 신라의 국력이 [[백제]]보다 강했다는 것이 학계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650년대 신라가 백제의 공세에 수세로 일관한 것은 1대1의 국력 차이보다는 북쪽의 고구려, 서남쪽의 백제, 동남쪽의 일본에 둘러쌓여있는 지정학적인 조건 탓이 컸다.] 백제에게는 관계 정상화를 두고 계속해서 거짓정보를 흘렸는데, 이 상황에서도 판단을 잘못하며, 자아도취한 [[의자왕]]은 결국 성충의 충언을 무시하고 그를 아사시키는 병크를 터트렸다. 고종은 마침내 660년 3월 [[소정방]]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임명하여 대군을 편성, 백제를 멸망시키도록 지시하고 신라 또한 [[김유신#s-1]]과 50,000명의 군사를 보내 동서로 협공하도록 했다. [[소정방]]이 군대를 이끌고 오는 것을 의자왕이 파악할 때쯤, [[한강]] 유역과 [[대야성]]에 주둔하고 있었던 백제의 주력군을 소집하고, 왜국에 파병을 요청하기 위해서, [[계백]]에게 군사 5,000명을 주어 지연전을 펼치도록 했지만, [[황산벌 전투]]에서 전멸했고 자신은 [[웅진성]]으로 달아났으나, [[예식진]]의 배반으로 결국 660년 7월 18일, 항복을 선언했다. 당군은 의자왕을 포함해 부여씨 왕족 및 귀족 93명, 그리고 일반 백성 12,000여 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이후 백제는 지방군을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이 시작되어 약 3년간 항쟁했으나 부흥군과 파병된 [[왜군]]의 연합군이 663년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몰살당하며, 백제의 잔여 세력까지 완전히 몰락했다. ===== 숙적인 [[고구려]]를 멸망시키다. ===== 동맹국인 [[백제]]가 660년에 멸망하자 고구려는 [[신라]], [[당나라]], 양쪽에서 압박을 받으며 고립 상태가 되었다.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지만 이는 태종 당대는 백제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기도 하고, 당시 준비 중이던 대규모 고구려 원정에 대한 중지 정도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애초에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인 태종이 고구려군에 패퇴했고 이후로도 꾸준히 전쟁을 벌이다가 붕어했기 때문에 고구려 정벌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자신의 숙원 사업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655년에 고구려와 백제, [[말갈]]이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여 33개 성을 빼앗자 신라의 [[태종 무열왕|김춘추]]가 구원병을 요청했고, 이에 고구려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선제공격을 했지만 패퇴했다. 659년에도 재차 공격했지만 성과없이 퇴각했다. 그러다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하자 고구려를 고립시켰다고 판단하고, 이를 곧 정벌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 고종은 661년 정월에 대규모 원정대를 편성했다. 4월, 결국 고종은 군대를 내보낸다. 이에 대해서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의 기록이 약간씩 다르다. 대략 계필하력을 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을 평양도행군대총관, 임아상을 패강도행군대총관, 소사업을 부여도행군대총관, 정명진을 누방도행군총관, 방효태를 옥저도행군총관[* 정명진과 방효태는 기록에 따라 총관, 대총관이 각각 다르게 기술되었다.]으로 삼아 총 35개 군에 달하는 대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도록 했다. [* 1개 군 = 최소 5,000명이라는 《당육전》의 기록을 기준으로 기미주의 병력이 추가되어 200,000명을 조금 상회하는 수준의 병력으로 보기도 하지만 앞서 편성된 백제원정군 휘하 14군, 총 130,000명의 편제를 생각해본다면 30~40만명 내외로 보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가장 먼저 고구려 영내에 진입한 것은 [[소정방]]이 이끄는 평양도행군이었다. 661년 8월, 소정방은 바다를 통해 패수로 진입하여, 이를 저지하는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평양]] 근처인 마읍산을 점령하여 군영을 세운 후 평양을 포위했다. 그러나 [[평양성]]의 함락이 쉽지 않았고, 전쟁은 장기전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서북 지역에서 튀르크계 [[철륵]](퇼레스)이 봉기하면서 [[글필하력]][* 글필하력은 [[랴오허|압록수]]에서 그곳을 지키던 연남생의 고구려 군대를 대패시켰으나 고종의 조서를 받고 철군했다. 여기서 [[연남생]]의 고구려군을 대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조서를 받고 철군했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데, 철륵의 봉기도 주 요인이었지만 글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의 정황을 보면 글필하력이 연남생의 군대를 대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도우러 온 요동 지방의 고구려군에게 공격을 받았거나, 연남생의 군대와 싸우다가 전쟁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거나, 연남생의 군대와 요동 지역의 고구려군의 협공으로 인해 대패하고 철군했을 것이다.]과 [[소사업]]군은 철수해야만 했고, [[임아상]][* [[사수 전투]]에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의해 패사했다.], [[정명진]][* 신성을 공략했으나 실패했고, 글필하력과 소사업의 군대가 철군할 때 정명진의 누방도행군은 이를 틈탄 고구려군의 반격을 받아 정명진은 부장 양사선과 함께 난전 중 전사했다.], [[방효태]][* 사수 전투에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의해 방효태와 그의 13명의 아들을 포함한 전군이 몰살당했다.] 등의 사령관들이 줄줄이 패배해 죽어나갔으며 소정방도 김유신의 구원에 의해 겨우 살아 돌아갔다. 이후 당고종은 철륵의 봉기를 진압하고, [[토번]]의 도전에 대처하는 등 바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연개소문]]에게 연이어 대패한 이후 [[고구려]]와의 전쟁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발을 빼려는 수순에 들어서려던 당고종은 때마침 [[연개소문]] 사후 그 세 아들들간의 정권 투쟁의 결과로 맏아들 [[연남생]]이 [[국내성]] 일대를 거느리고 투항(666년)하자 재차 공격에 들어갔다. 여기에 [[신라]] 또한 연씨의 분열로 [[연정토]]가 바치는 영토를 얻었고 남쪽에서 협공에 들어갔다. 당군은 667년 1월,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 북쪽의 요충지인 신성을 비롯, 그 휘하의 16개성을 함락시키고 국내성에 웅거한 연남생과의 연결선을 확보했으며, 668년 2월에는 부여성과 휘하 40여개의 성을 함락시켜 후방을 안정화시켰다. 그리고 그해 8월 [[평양성]]을 포위한 후, 신라와의 협공으로 9월 21일 마침내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보장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이로써 고구려는 건국 705년 만에 멸망했다. ===== [[나당전쟁]] ===== 그러나 대고구려 전쟁이 끝나자 고종은 [[신라]] 또한 장악하고자 시도했다. [[백제]] 영역에는 [[웅진도독부]]를, 고구려 영역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명명'''하면서 자국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이전부터 [[당나라]]에 대한 불만을 갖고, 당의 야욕을 눈치채고 있었다. 결국 신라군이 [[검모잠]]과 [[안승]]이 이끄는 [[고구려부흥운동]] 세력과 힘을 합쳐, 요동과 웅진도독부를 선제공격하면서 [[나당전쟁]]이 일어났다. '''결국 당고종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마저 없애버리려는 삼국시대의 [[진 최종 보스]]'''로 등극했다. 나당전쟁은 7년에 걸처 이어졌으며, 결국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기벌포 해전]] 등 중요한 교전에서 신라군에게 패배했다. 이에 당고종은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를 한반도 바깥 북쪽으로 철수시켜 사실상 나당전쟁을 포기했다. 이후 양국은 장기간에 걸쳐 관계가 사실상 단절되다시피 했다가 [[현종(당)|당현종]]때 이르러 관계가 복구되었다. ===== [[토번]]과의 전쟁 ===== 고종은 토번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도 실패만 맛보았다. 이는 이 시기에 [[가르친링]]이 토번의 실권을 잡으며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토번에 대해 [[이이제이]]의 용도로 이용하며 [[당태종]] 이래 부용 세력으로 유지하고 있었던 모용선비족의 [[토욕혼]]을 토번이 663년에 대파하고, 장악한 후 안서 4진을 공격해 함락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고종은 [[설인귀]]를 대총관으로, 아사나도진과 곽대봉을 부사령관으로 삼아 100,000명의 대군을 편성해 670년 공격에 나서게 했지만 [[가르친링]]에게 [[대비천 전투]]에서 완파당해 장군들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돌아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후 토번은 남쪽으로는 파라문, 서쪽으로는 총령, 북으로는 돌궐에 이르며 '10,000여 리가 되는' 강역을 지배하에 두었고, 기나긴 국경선을 치고 빠지며 [[당나라]]를 괴롭혔다. 679년 이경현과 유심례가 재차 100,000여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토번을 공격했지만 이 또한 참패하여, 유심례는 사로잡히고 이경현만 간신히 귀환했다. [[당나라]]는 이에 토번에 대한 대책에 골몰했지만, 공격하기는 어렵고 방어하기는 쉬운 [[티베트]] 고원으로 쳐들어가기도 무리이고 딱히 대응할 방도가 없어 각지의 방어를 견고히 하는 소극적인 정책만을 수행하게 된다. ==== 대내 정책 ==== ===== 영휘의 치 ===== 대내적으로는 '''《[[무덕율령]]》''', '''《정관율령》'''을 토대로 '''《영휘율령》'''을 완성시키고, 얼마 안 가 [[장손무기]]에게 《영휘율령》의 조목마다 주석을 달게 하여 '''《당률소의》'''를 작성, 전국에 반포하고, 뒤이어 《율소찬정》, 《오경정의》(五經正義)를 반포하는 등 '''[[당나라]]의 율령(형법과 행정법)과 전장 제도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에 《씨족지》를 고친 '''《성씨록》'''을 만들어 기존 사족들의 실권을 제한하고, 서족들의 등급을 높이는 개혁적인 정책도 실시했다. 또한 정관 말년에 심화된 토지 겸병을 막기 위해 구분전과 영업전의 매매를 금지하여 '''균전제를 유지'''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런 점에서는 전형적인 '''수성군주'''라 할 수 있다. 660년부터 병치레를 하게 되면서 [[측천무후]]가 국정에 개입하게 되는데, 관직을 늘리고 범계를 늘리며 복식을 확정 짓고, 인재 채용의 폭을 넓히는 '''<전주법>'''을 개정했으며 [[과거 제도]]를 수정, 보완하는데 측천무후가 함께 했고, 이 과정에서 실권이 천천히 측천무후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내치는 상당히 성공적이었으며 이에 고종과 측천무후는 666년 태평성세를 이룬 성천자만이 할 수 있는 [[타이산|태산]]에서의 봉선을 수행하여 자신들의 치세가 성공했음을 자평하기도 했다. ===== 측천무후의 국정 개입과 [[무주(당나라)|무주]]혁명 ===== 고종은 집권 초에는 상당히 의욕적으로 정치를 수행했으나 660년 이후부터는 자주 병치레를 하게 되면서 측천무후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고, 정치적으로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고종의 신임을 받아 권력을 확보한 측천무후는 아직 힘이 남아 있었던 장손무기, 한원, 유석, 우지녕 등을 숙청했으며, 반대파인 재상 상관의도 664년에 폐태자였던 [[이충(당나라)|이충]]과 모의하여 반역을 일으키려 했다고 몰아 처형했다. 고종이 무후를 폐위하기 위해 칙서를 내린 것이 들통나 무후가 고종에게 가서 따졌고, 고종이 상관의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상관의 폐위 조서 사건'''은 당시 고종의 권력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라는 게 세간의 평가이다. 하지만 고종은 병이 나아지면 직접 국정을 수행하기도 했고, 이 시기 무후의 정치력은 기본적으로 고종의 신임에 근거한 것이었기 때문에 딱히 고종의 권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상관의 폐위 조서 사건 이후로 고종은 국가 중대사는 재상들이 의결하고, 정책 결정도 재상을 통하도록 만들었는데 [[측천무후]]는 [[이의부]]와 [[허경종]]이 물러난 이후에는 얼마 동안 재상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든다거나 재상 중에 자기 파벌을 심지 못했기 때문에 이전보다 힘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고종은 측천무후의 황후 책봉에 반대했던 배행검 같은 인사들도 임용했을 정도로 관료 임용에 있어서 측천무후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실제로 폐위 운운도 권한이 강해지는 무후에 대한 단순 견제에 가깝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고종의 건강 상태는 정말 좋지 못했기 때문에 고종이 쓰러지고 무후까지 폐위되면 당 황실은 사실상 공황 상태가 되어버릴 지경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장손무기로 대표되는 [[관롱집단]]을 제압한 상황에서 황실의 두 축인 황제와 황후가 대립하다가 양자 모두가 무력화되어 권력이 공황 상태가 되면, 다시 황권 도전 세력이 등장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서 무후는 상관위 조서 사건 이후에 자신이 너무 지나쳤다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고종의 신임을 회복했다. 황태자로 앉힌 장남 '''이홍'''이 675년 병으로 죽자[* 《신당서》에서는 독살설을 제기하고 있지만 《자치통감》 등에서는 단지 소문이 있을 뿐이라 했으며, <사시황태자굉효경황제> 및 <책시효경황제문> 등 당시의 기록에는 '병이 완쾌된 줄 알고 업무를 넘겼다가 병이 심해져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둘째 '''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다가, 680년에 어머니의 숙청에 불만을 품자 폐위하고[* 폐위 이후 곧 무후가 죽였다.] 셋째 '''이현'''(李顯)을 황태자로 세웠다. 674년 고종은 병세가 심해져 더 이상 정사를 돌보기 힘들게 되자 자신은 '''천황''', 무후는 '''천후'''로 칭해 공동 정부의 구도를 형성시켰고[* 선제 태종의 아내뻘인 무후의 환궁과 공치는 당 왕조 초기까지 유목문화의 영향력이 강했다는 증거로 거론된다. 실제로 수문제와 그 아내인 독고황후가 공치를 한 것이 이 시기 기준으로 100년도 안된 시점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수문제의 독고 황후는 선비족 출신의 관롱 귀족으로 워낙 배경이 강하고 유능해서 수문제에게도 부담이 되는 상황이었던 반면, 고종과 측천무후는 고종의 병약함과 측천무후의 약한 세력이 조화를 이뤘다.], 675년 장남 이홍이 죽자 무후에게 [[수렴청정]]을 맡기면서 사실상 정권에서 물러났다. 심지어 고종은 무후에게 제위를 넘기려고까지 했다가 재상 학처준의 반대로 이를 취소한 적도 있었다.[* 서양에서는 부부 계승이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또한 무후 사후에는 자신의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줄 테니 측천무후의 유능함을 알고 뒤를 맡긴 셈이나 마찬가지이다.][* 다만 서양에서의 부부 계승은 동양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서양에서는 설령 왕비라고 해도 자신이 상속받은 땅을 가져오는 경우도 많았고, 그렇기에 사실 권리로만 따지면 남편인 왕과 별 차이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의 결혼으로 태어난 트라스타마라 왕조 [[스페인 제국]]이 있다. 이때 이 두 사람은 부부이면서 공동왕이기도 했다.] 고종이 붕어하자(683) 황태자 이현이 [[중종(당)|중종]]으로 제위에 올랐으나 중종의 황후 위씨와 그녀의 아버지 [[위현정]]이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에 측천무후는 중종을 내쫓고, 그녀의 넷째 아들인 '''이단'''을 [[예종(당)|예종]]으로 즉위시켰으며 이후 계속해서 일어난 반대파들의 저항과 '''[[이경업|서경업]]의 반란'''(684)을 진압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690년 측천무후는 예종도 몰아내고 드디어 제위에 올라 [[무주(당나라)|주나라]]를 세웠다.('''무주혁명''') 측천무후는 나라를 잘 다스렸지만('''무주지치''') 잦은 [[숙청]]을 했기에 당나라 황실은 이후에도 [[위황후]], [[안락공주]][* 710년 위황후와 안락공주 모녀는 연흠융(燕欽融)이 [[중종(당)|중종]]에게 "두 모녀가 나라를 장악하려고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추궁받을까 두려워 중종을 독살했다.]('''[[경룡정변]]''', '''[[당륭정변]]'''), [[태평공주]]('''[[선천정변]]''') 등의 음험한 권력 투쟁으로 [[현종(당)|현종]]이 즉위할 때까지 몸살을 앓았다.('''[[무위지화]]''') 이렇게 된 계기가 측천무후에게 있다고 보는지, [[측천무후]]는 '''잔인하다'''는 나쁜 평가와 '''뛰어난 통치자'''라는 좋은 평가가 함께 나온다. == 가정 관계 == === 아내 === 폐황후 왕씨(廢皇后 王氏) [[?]] ~ [[655년]] 사망 측천순성황후 무씨(則天順聖皇后 武氏) 624년 출생 ~ 705년 사망 * 5남 '''의종 경황제''' [[이홍(당)|이홍(李弘)]] 652년~675년 * 6남 장회태자 이현(李訢) 654년~684년 * 7남 '''중종 화황제''' [[중종(당)|이현(李顯)]] 656년~710년 * 8남 '''예종 흥황제''' [[예종(당)|이단(李旦)]] 662년~716년 * 3녀 [[안정공주]] 654년~654년 * 4녀 진국[[태평공주]] 이영월(李令月) 665년~713년 == 대중매체에서 ==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드라마)|연개소문]]>에선 [[박준혁(배우)|박준혁]]이 연기했다. * 2007년 [[KBS]] 드라마 <[[대조영(드라마)|대조영]]>에선 한범희가 연기했다. * 2013년 KBS 드라마 <[[대왕의 꿈]]>에선 [[서동수]]가 연기했다. 위의 두 드라마에서 묘사됬던 유약한 이미지와 다르게 정복 군주로써의 이미지가 부곽되었다. * 2014년 중국 드라마 <[[무미랑전기]]>에선 [[리즈팅]]이 맡았다. 측천무후에 대한 사랑이 매우 깊은 것으로 표현된다. 자세한건 [[당고종(무미랑전기)]] 참고. * 2021년 드라마 <풍기예상>에서는 딱히 능력은 특출나지 않지만 효심이 깊은 것으로 표현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 [include(틀:신당서)] ---- [include(틀:당시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