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걸복치반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서진 군주)]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50B27 0%, #663854 20%, #663854 80%, #350B27)" '''{{{#fff 서진 제3대 군주[br]{{{+1 太祖 文昭王 | 태조 문소왕}}}}}}'''}}} || || '''[[묘호|{{{#fff 묘호}}}]]''' ||<(> '''[[태조]](太祖)''' || || '''[[시호|{{{#fff 시호}}}]]''' ||<(> 문소왕(文昭王) || || '''[[성씨|{{{#fff 성}}}]]''' ||<(> 걸복(乞伏) || || '''[[휘|{{{#fff 휘}}}]]''' ||<(> 치반(熾磐) || || '''[[연호|{{{#fff 연호}}}]]''' ||<(> 영강(永康, 412 ~ 428) || || '''{{{#fff 생몰}}}''' ||<(> ? ~ 428년 || || '''{{{#fff 재위}}}''' ||<(> 412년 ~ 428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서진(오호십육국시대)|서진]](西秦)의 제3대 황제. [[걸복건귀]]의 장남. 팽창주의 정책으로 서진의 전성기를 열었지만 [[북량]] 공략에 너무 정신이 팔린 나머지 [[북하]]에게 후방 본진이 털리며 국가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왕이기도 하다. == 생애 == === 초창기 ===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단호해 결단을 잘 내렸고, 임기응변과 지략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400년, 걸복건귀가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에게 패해 나라가 일시적으로 멸망하자, [[남량]]에 인질로 보내져 서평군(西平郡)에 머물렀다. 이후 남량을 탈출하여 후진에 투항했는데, 후진의 황제 요흥은 걸복치반을 받아주고 진충장군, 흥진태수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지나 걸복치반은 승진해 건무장군, 행서이교위(行西夷校尉)에 임명되어 군대를 이끌고 원천(苑川)에 진수했다. 409년, 아버지 걸복건귀가 다시 서진을 세우고 진왕(秦王)을 자칭할 때 서진으로 돌아가 세자에 임명되고 우승대장군, 도독중외제군사, 녹상서사를 겸했다. 서진을 9년만에 부활시킨 걸복건귀는 후진을 공격해 금성(金城), 약양, 남안, 농서 등의 지역들을 침범했다. 서진의 기세가 매서운 것을 본 요흥이 태사 색릉을 서진으로 보내어 걸복건귀를 달래자, 걸복건귀 또한 사신을 보내 칭신을 하면서 두 세력은 서로 화친하였다. 요흥은 걸복건귀를 하남왕에 봉하고, 세자 걸복치반은 진서장군, 좌현왕, 평창공으로 삼았다. 411년 8월, 중군장군 걸복심건(乞伏審虔)과 함께 남량 정벌을 위해 출병하였다. 남량은 태자 독발호대를 보내 막았지만 영남에서 패했고, 걸복치반의 서진군은 소와 말 10여만 마리를 노획했다. 412년 4월, 걸복치반은 다시 남량을 쳐 백토(白土)에서 남량의 삼하태수 오음(吳陰)을 무찌르고 걸복출누(乞伏出累)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 왕위 계승 === 그 해 6월, [[걸복국인]]의 아들인 걸복공부(乞伏公府)가 걸복건귀와 그 자녀 10여명을 살해한 뒤, 대하(大夏)로 가 난을 일으켰다. 걸복치반은 광무장군 걸복지달(乞伏智達), 양무장군 걸복목혁간(乞伏木奕干)에게 기병 3천을 주어 걸복공부를 정벌하게 하였다. 그리고 진경장군 걸복담달(乞伏曇達)은 도성 담교에, 효기장군 걸복누기(乞伏婁機)는 원천에 각각 군사를 주어 배치시켰다. 걸복공부는 대하에서 걸복지달에게 대패하여 자신의 동생인 흥국태수 걸복아시(乞伏阿柴)에게로 도망쳤다. 걸복지달은 이를 추격하여 첩난(疊蘭)에서 걸복아시까지 격파해버리고 걸복아시와 그 아들 4명을 참수했다. 이번에도 살아남은 걸복공부는 또 도망치지만 결국 걸복지달에게 사로잡혀 담교로 압송되었고, 걸복치반은 그를 [[거열형]]에 처했다. 걸복공부를 죽인 걸복치반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하남왕을 자칭하고 연호를 영강(永康)으로 개원하였다. 적경(翟勍)을 상국으로 삼고, 국경(麴景)을 어사대부, 단휘를 중위, 동생 걸복연조(乞伏延祚)를 금중녹사, 번겸(樊謙)을 사직(司直)에 임명하였다. 또, 관직체계를 개편해 상서, 육경, 시중 등을 폐한 뒤 중좌우상시를 설치하고 그 밑에 시랑을 각각 3명씩 두었다. 413년 정월, 걸복치반이 용양장군 걸복지달, 평동장군 왕송수(王松壽)를 보내 [[토욕혼]]의 모용수낙간(慕容樹洛干)을 토벌하게 하니, 걸복지달과 왕송수는 요하(澆河)에서 수낙간을 격파하고 3천여 가구를 사로잡아 귀환하였다. 3월에는 진동장군 걸복담달과 왕송수에게 기병 1만을 주어 동쪽으로 진격하게 했다. 걸복담달과 왕송수는 백석천(白石川)에서 휴관족 권소랑(權小郎)과 여파호(吕破胡)를 패퇴시켜 휴관족 남녀 1만여 명을 사로잡고 백석성을 점거하자, 나머지 휴관족 1만여 명이 투항하였다. 그러나 권소성(權小成), 여노가(吕奴迦) 등은 농우의 휴관족들을 이끌고 백갱(白坑)에서 끝까지 항거했다. 걸복담달이 진격하여 백갱을 무너뜨리고 권소성, 여노가 등 4,700명의 휴관족을 참수하자 농우의 휴관족들마저 모두 서진에 투항했다. 때마침 후진의 색릉도 서진에 농서를 들고 항복해와 걸복치반은 농서, 농우 지역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 해 4월, 관군장군 적소(翟紹)를 보내 토욕혼의 부락 중 하나인 구방(句旁)을 읍근천(泣勤川)에서 격파하고 많은 사람들을 노획하였다. 뒤이어 걸복치반도 여러 제장들을 거느리고 토욕혼 토벌에 나서, 장유천(長柳川)에서 토욕혼의 부락 지방(支旁)을 무찌르고, 갈혼천(渴渾川)으로 가 토욕혼의 또다른 부락인 굴달(掘達)도 격파하였다. 서진군은 이 원정에서 토욕혼인 남녀 2만8천여 명을 사로잡아 9월에 도성 부한으로 개선했다. === 남량 멸망 === 414년 정월, 남산(南山)에서 오색빛 구름이 쏫아올랐다. 걸복치반은 이를 길조라 여겨 매우 기뻐하며 좌우 대신들에게 말했다. > 금년(今年)에 내가 천하를 평정하여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것 같구나! 이후 무기를 정비하고 병마를 훈련시켜 전쟁 준비에 온 힘을 쏟았다. [[남량]]의 [[독발녹단]]이 타계한부(唾契汗部)와 을불부(乙弗部)를 토벌하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걸복치반은 자리에서 일어나 칼을 뽑고 "움직인다!"를 외쳤다. 놀란 군신들은 모두 반대하고 나섰으나 태부 초습(焦襲)만이 기회를 놓쳐선 안된다며 출정에 찬성하였다. 걸복치반은 즉시 2만 보기를 이끌고 남량의 도성인 낙도(樂都)를 습격해 포위했다. 남량의 태자 독발호대(禿髮虎台)가 성벽에 의지해 수성했지만 걸복치반은 공성을 시작한지 열흘만에 낙도를 함락시켰다. 낙도에 입성한 걸복치반은 논공행상을 신속히 끝낸 뒤, 평원장군 걸복첩건(乞伏捷虔)에게 기병 5천을 주어 남량왕 독발녹단을 추격하게 했다. 그리고 진남장군 걸복겸둔(乞伏謙屯)을 낙도에 주둔기키고 사로잡은 독발호대와 남량의 문무백관, 백성 만여호를 도읍 부한(枹罕)으로 이주시켰다. 독발녹단은 반란을 제압하긴 했으나 도성이 함락되어 휘하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도망치고 음리록(陰利鹿)만이 그의 곁을 지켰다. 더이상 저항할 힘이 없어진 독발녹단은 그 길로 서진에 항복하니 남량이 멸망하였다. 걸복치반은 독발녹단을 상객의 예로 예우해주며 표기대장군, 좌남공에 봉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독발녹단을 짐독으로 독살하였다. 또, 저거몽손의 부추김을 받은 독발호대가 그의 누이인 왕후 독발씨, 무위장군 월질낙성(越質洛城)과 걸복치반의 암살을 모의하다 일이 새어나가 관련자들 모두 처형당했다. 걸복치반은 진왕(秦王)을 자칭하고 백관을 설치하면서 독발녹단의 또다른 딸을 새로 왕후로 삼았다. === 이어지는 대외정벌 === 415년 3월, [[북량]]의 저거몽손이 서진의 광무(廣武)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걸복치반은 걸복퇴니인(乞伏魋尼寅)을 보내 호문(浩亹)을 치게 하고, 절배(折斐)에게 기병 1만을 주어 늑지령(勒姐嶺)을 점령하게 했다. 하지만 둘 모두 저거몽손에게 격파당해 걸복퇴니안은 주살되고 절배는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 그 해 5월, 걸복치반은 친히 3만 병력을 거느리고 북량의 황하(湟河)를 쳤다. 황하태수 저거한평(沮渠漢平)은 수하 초창(焦昶)과 단경(段景)의 꾀임에 넘어가 서진에 항복했다. 걸복필달이 저거한평을 대신하여 황하태수에 부임하고 을불부의 굴간(窟干)을 쳐 3천여 호의 항복을 받아냈다. 또, 양무후 걸복담달을 대장으로 왕송수 등을 보내 적수(赤水)에서 강족 미저강박(彌姐康薄)을 쳐 항복시켰다. 416년 정월, 걸복치반이 후진의 조양공 팽리화(彭利和)가 지키고 있는 강천(漒川)을 공격하자 저거몽손이 후진을 구원하기 위해 서진의 석천(石川)을 쳤다. 걸복치반이 답중(沓中)으로 물러나, 급히 걸복담달과 걸복첩건에게 5천 기병을 주어 석천을 구원하게 하니 저거몽손도 군사를 물렸다. 이후 저거몽손은 서진으로 사자를 보내 걸복치반을 초대하고, 두 나라는 그 자리에서 화친했다. 북량의 위협이 사라지자 걸복치반은 걸복담달과 왕송수에게 1만 기병을 주어 후진의 상규를 치게 했다. 후진의 진주자사 요애(姚艾)가 출병하여 걸복담달과 맞섰으나 포수(蒲水)에서 패배하고 상규로 도망쳤다. 걸복담달과 왕송수의 군대는 황석(黄石), 대강(大羌) 두 지역을 함락하고 5천여 호를 노략하여 수도 부한으로 돌아갔다. 그 해 12월, 걸복치반이 [[동진]]의 권신 [[유유]]에게 사자를 보내 칭신하였다. [[유유]]는 답신하여 그를 평서장군, 하남공에 삼았다. 417년 2월, 안동장군 걸복목혁간에게 7천 기병을 주어 토욕혼의 모용수낙간을 재차 토벌하게 했다. 걸복목혁간은 모용수낙간의 사촌동생인 모용아시(慕容阿柴)를 요간천(堯杆川)에서 격파하고 5천여 호를 약탈해 돌아갔다. 모용수낙산이 서진의 군세를 피해 백난산(白蘭山)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걸복치반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 해 7월, 상국 적경이 사망해 걸복담달을 좌승상, 걸복원기(乞伏元基)를 우승상으로 삼았다. 후진이 유유에 의해 멸망하고 후진의 진주자사 요애가 서진에 귀순을 청했다. 걸복치반은 항복을 받아들여 요애를 정동대장군, 진주목에 임명했다. 418년, 선비족 을불부의 오지연(烏地延)이 2만여 호를 이끌고 서진에 귀순했다. 걸복치반은 오지연을 건의장군에 임명했다. 서진에 항복했던 요애가 배반하여 북량에 항복하려 했지만 그 무리들은 서진에 남길 원해 요애를 진주에서 쫓아냈다. 요애를 따랐던 무리들은 그의 숙부 요준을 추대하고 서진 조정에 보고했다. 걸복치반은 요준을 시중, 중서감, 농서공에 임명하였다. 419년, 걸복치반이 정서장군 걸복공자(乞伏孔子)에게 명하여 토욕혼을 치고 약수(弱水) 이남의 땅을 되찾게 하였다. 걸복공자는 약수에서 토욕혼의 멱지(覓地)를 대파하고 멱지는 6천여 명을 이끌고 투항했다. 걸복치반은 그를 약수호군에 임명하였다. 좌위장군 걸복필달, 건위장군 제군(梯君) 등이 군사를 이끌고 강천(漒川)에서 팽리화를 공격해 격파했다. 팽리화는 단신으로 [[구지]]로 달아났고 그의 처자식들을 사로잡았다. 걸복치반은 팽리화가 이끌던 강족 3천여 호만 도성 부한으로 이주시키고 나머지 강족들은 원래 살던 곳에서 편히 살게 하였다. 420년 정월, 아들인 [[걸복모말]]을 세자로 삼고 영무군대장군, 도독중외제군사를 겸하게 했으며 연호를 건홍(建弘)으로 바꿨다. 6월에 동진의 유유가 제위를 찬탈해 [[송(남조)|유송]]을 건국하고 조서를 내려 걸복치반을 안서대장군에 임명했다. 421년 4월, 죽은 모용수낙간의 뒤를 이은 토욕혼의 왕 모용아시가 서진에 투항하였다. 걸복치반은 그를 정서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안주목, 백란왕으로 삼았다. 7월에는 북량이 화친을 깨고 우위장군 저거선선(沮渠鄯善), 건절장군 저거구생(沮渠苟生) 등이 병력 7천으로 서진을 쳤다. 정북장군 걸복목혁간이 보기 5천을 이끌고 오간수(五澗水)에서 이들을 격파하고 2천여 명을 참수, 저거구생을 사로잡았다. 패배한 저거선선은 북량으로 도망쳤다. 422년 정월, 정서장군 걸복공자에게 기병 2만을 주어 나천(羅川)의 글한독진(契汗禿眞)을 치게하니, 걸복공자는 대승하여 남녀 2만여 명과 소, 양 등의 가축 10만여 마리를 얻고 돌아왔다. 글한독진이 기병 수천 명만 데리고 서쪽으로 도망쳐버리자, 글한수해(契汗樹奚)는 5천여 호를 이끌고 서진에 항복했다. 같은 해 7월, 북량의 전장군 저거성도(沮渠成都)가 1만 병력을 이끌고 오간수를 침범했다. 걸복치반이 정북장군 출련건(出連虔)에게 기병 6천과 주어 치게 하니, 출련건은 북량군을 격파하고 적장 저거성도를 포획하였다. 424년 4월, 진남장군 걸복길비(乞伏吉毗)를 남쪽으로 보내 강족 부락 백구(白苟), 차부(車孚), 최제(崔提), 방위(旁爲)를 병탄하였다. 이후 세자 걸복모말이 북량의 황중을 점거하고 임송을 약탈해 백성 2만여 명을 부한으로 끌고 왔다. 425년 4월, 평원장군 질노건(叱盧犍)을 보내 임송을 공격하고 북량의 진남장군 저거백제(沮渠白蹄)를 사로잡았다. === 서진의 쇠퇴 === 426년 8월, 걸복치반이 보기 3만으로 북량의 서안(西安)을 쳤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에 군사를 돌려 번화(番禾)로 진격하였는데, 이틈에 저거몽손이 [[북하]]에 사신을 보내 서진을 쳐달라 부탁하였다. [[혁련창]]은 저거몽손의 부탁을 들어주어 정남장군 호로고(呼盧古)에게 2만 기병을 주어 원천을 치게 하고, 거기장군 혁련위벌(赫連韋伐)에겐 기병 3만으로 남안을 치게 했다. 이에 걸복치반은 북하의 군대를 막기 위해 뒤늦게 회군하였다. 도성 부한으로 돌아온 걸복치반은 좌승상 걸복담달에게 부한 수비를 맡겼다. 전황은 상당히 불리하였는데, 혁련위벌은 이미 남안을 함락시켜 진주자사 적상(翟爽)과 남안태수 이량(李諒)을 사로잡았고, 모용아시의 뒤를 이은 모용모괴(慕容慕璝)는 서진을 배반하였다. 부한의 수비를 맡은 걸복담달마저 호로고에게 패하여 도성이 뚫리기까지 했지만 진경장군 조수생(趙壽生)이 이끄는 3백 결사대가 이들을 무찔러 성밖으로 쫓아냈다. 호로고는 부한에서 물러나 황하(湟河)에 이르러 혁련위벌과 군을 합쳤고, 이에 사주자사 출련건이 후장군 걸복만년(乞伏萬年)을 보내 황하에서 북하군을 격파하였다. 한 차례의 위기를 넘기긴 했으나 북하의 군대가 도성으로 진격하면서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닌 탓에 서진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특히 도성인 부한의 타격이 막심해 걸복치반은 한동안 정련에 머물러야만 했다. 427년에 서진에 복속했던 여러 강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좌승상 걸복담달과 정남장군 걸복길비를 파견해 강족들을 위로하게 했다. 하지만 걸복담달은 강족들에게 사로잡혀 북하로 진상되고, 걸복길비는 강족들에게 공격받아 군사 9할을 잃고 돌아왔다. 양주자사 출련보정(出連輔政)은 구지국의 공격을 받아 도망치고 그를 대신해 임명된 오한(吳漢) 역시 강족들의 공격을 받아 양주(梁州)를 버리고 도성으로 귀환했다. 결국, 순식간에 국력이 쇠약해져 걸복치반은 당시 북하를 야금야금 정복해나가던 [[북위]]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428년 5월, 걸복치반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걸복모말이 뒤를 이었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문소왕(文昭王)으로 무평릉(武平陵)에 묻혔다. == 둘러보기 == ||<-5><#663854> '''[[서진(오호십육국시대)|{{{#FFF 서진의 역대 군주}}}]]''' || || 2대 고조 무원왕 [[걸복건귀]] || {{{+1 ←}}} || '''3대 태조 문소왕 걸복치반''' || {{{+1 →}}} || 4대 여무왕 [[걸복모말]] || [include(틀:역대 서진 군주)] [include(틀:진서)]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황제]][[분류:428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