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잠성 전투 (문서 편집) [include(틀:백제의 대외전쟁)] [include(틀:신라의 대외 전쟁)] ||<-3> {{{+1 '''가잠성전투[br]椵岑城戰鬪'''}}} || || '''시기''' ||<-2>1차 전투 : [[611년]] 음력 10월~[[612년]] 정월. [br]2차 전투 : [[618년]][br]3차 전투 : [[628년]] 음력 2월 || || '''장소''' ||<-2><:>[[신라]], 가잠성 (현재 위치 불명)[*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 학계에서 논란이 있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의 죽주산성설, [[충청북도]] [[괴산군]] 군자산성설 등이 있다.] || || '''원인''' ||<-2>[[무왕]]의 지속적인 신라 공세. || || '''교전 세력''' || '''백제'''[br]{{{-2 (공격자)}}}[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3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red; font-size: 1.2em" {{{#white '''승'''}}}}}} || '''신라'''[br]{{{-2 (방어자)}}}[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3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blue; font-size: 1.2em" {{{#white '''패'''}}}}}} || || '''주요 인물'''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3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C00D45; font-size: .8em" {{{#white '''지휘관'''}}}}}}[br][[백제|[[파일:백제 군기.svg|width=20]]]] 지휘관 불명[* 1차 공방전의 경우에는 "대군"이 출정한 점을 들어 [[대성팔족]]의 성씨중 [[무왕]]대에 가장 번성했던 사택씨(砂宅氏) 가문의 사람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1,2,3차)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3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C00D45; font-size: .8em" {{{#white '''지휘관'''}}}}}}[br] [[신라|[[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width=20]]]] '''[[찬덕]]''' [[전사(죽음)|†]] (1차) [br] [[신라|[[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width=20]]]] '''[[변품]]''' (2차)[br][[신라|[[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width=20]]]] [[해론]] [[전사(죽음)|†]] (2차) [br] [[신라|[[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width=20]]]] 지휘관 불명 (3차) || ||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 ||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 || '''결과''' ||<-2>신라의 최종 승리. || || '''영향''' ||<-2><(>백제의 신라 공세기조 유지. || [목차] [clearfix] == 개요 == [[신라]]와 [[백제]]간의 전투. 가잠성에서 펼쳐진 전투는 총 3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이중 가장 기록이 상세히 남아 있는 전투는 <[[해론]] 열전>에도 기록이 존재하는 1차와 2차 공방전이다. 가잠성의 위치는 현재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의 죽주산성설, [[충청북도]] [[괴산군]]설로 나뉘어 있다. ||[[파일:attachment/silla_abunai.jpg|width=470]][br]▲[[무왕(백제)|무왕]](6세기말) ~ [[의자왕]](7세기초) 시기 백제가 확장한 강역.[br]△해당 지도는 가잠성의 위치를 충북 괴산군으로 표기하였다.|| == 전투 == === 1차 공방전 === 백제 [[무왕]]은 611년 10월, 신라의 가잠성을 점령하기 위해 대군을 출동시킨다. 611년 2월부터 [[수양제]]가 [[고구려-수 전쟁|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식에 국지모(國智牟)를 [[수나라]]에 보내 [[고구려]] 침공 일정과 관련되어 알아보도록 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612년에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무왕(백제)|임금]]은 수나라에 협조한다고 했지만 실은 [[훼이크]]였다."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을 두고, 수나라와의 우군이던 신라가 고구려 침공에 협력하기 위해 병력을 고구려 전선에 집중한 것을 계산하고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강화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당시 가잠성을 지키던 성주는 전투가 발발하기 불과 1년전인 610년에 [[진평왕]]의 신임을 받아 가잠성 현령으로 부임한 '''찬덕'''이었다. 찬덕은 용맹함을 갖추고 있었으며, 진평왕이 이를 알고 보냈다는 점을 보아 과거에 전장에서 공을 세운 적이 있는 듯 하다. 가잠성에 도착한 백제군은 가잠성을 포위 공격했다. 찬덕은 용맹하게 백제군과 맞서 싸워 버텼으며, 백제군의 가잠성 공격 소식을 들은 [[진평왕]]은 상주(上州)[*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하주(下州)[* [[경상남도]] [[창녕군]].], 신주(新州)[* 경기도 [[광주시]].]에서 병력을 차출해 급히 구원에 나서게 했다. 이들 지역을 보면 알겠지만 신라에서도 최전선에 나가 있던 정예 병력을 투입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오히려 제대로 된 싸움을 하지 못하고 결국 물러나게 된다. 그 모습을 본 찬덕은 다음과 같은 한탄을 남겼다. >“세 주의 장수들이 적이 강한 것을 보고 진격하지 않고, 성이 위급한데도 구원하지 않으니 이는 의리가 없는 것이다. 의리 없이 사는 것보다는 의리를 지켜 죽는 것이 낫다.” >三州軍帥見敵强不進 城危不救 是無義也 與其無義而生 不若有義而死. >----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888&ref=y&cid=49628&categoryId=49628|제47권 <열전> 제7 -해론]]- 그리고 찬덕은 다시 병사들을 다독여 백제군과의 전투를 치열하게 이어 나갔고, 이 전투는 무려 100일간 이어졌다. 전투가 길어지는 데다 지원군 마저 오지 않은 가잠성은 하늘도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한겨울이었던 지라 식량이 떨어지고, 우물이 말라갔고, 결국 [[카니발리즘|시체를 먹고]], 오줌을 마시면서 버티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처절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도 찾아보기 힘든데 이런 상황에서도 가잠성의 신라군은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그러나 전황을 뒤집기는 힘들어 성이 함락될 위기가 되자 찬덕은 >"왕께서 나를 믿고 보내셨는데 내가 그 기대를 저버렸으니, 죽어서라도 백제인의 살집을 뜯어먹어 이 성을 되찾겠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느티나무]]에 달려들어 자결했다.[* 이와 비슷한 설화가 [[충청북도]] [[괴산군]]에 구전설화로 전해져온다. 이 때문에 가잠성이 그 인근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 존재한다.] 찬덕의 죽음 이후 612년 정월, 가잠성의 성문은 백제군에게 젖혀졌고 결국 성은 항복하고 말았다. >33년(서기 611) 겨울 10월, 백제 병사가 가잠성(椵岑城)을 100일간 포위하였다. 현령 찬덕(讚德)이 굳게 지켰으나 힘이 다하여 죽고 말았으며, 성은 함락되었다. >三十三年 冬十月 百濟兵來圍椵岑城百日 縣令讚德固守 力竭死之 城沒. >----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0&cid=49625&categoryId=49798|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평왕]]-''' ---- >겨울 10월, 신라의 가잠성(椵岑城)을 포위하여 성주 찬덕(讚德)을 죽이고 성을 멸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冬十月 圍新羅椵岑城 殺城主讚德 滅其城. >----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0&cid=49625&categoryId=49798|제27권 <백제본기> 제5 -무왕]]-''' === 2차 공방전 === 한편 [[진평왕]]은 이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전사한 찬덕의 아들 '''[[해론]]'''을 20세의 나이에 [[나마|대나마]]로 임명하고[* 신라의 경우에는 [[국가유공자]]를 우대하는 정책 중 하나로 전쟁터에 국가를 위해 용맹하게 싸우다 죽은 전사의 아들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소나]], [[야이차]] 등이 있다.] 618년에는 금산당주(金山幢主)로 임명했다. 그리고 618년에 북한산주(北漢山州)[* 현재의 [[경기도]] 일대로 주 성은 [[남한산성]]의 모태로 추정되는 과잠성으로 보여진다.(이기동, 2005)]의 변품(邊品)이 가잠성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을때 [[해론]]도 동참했다. 해론의 참전에는 아버지 찬덕을 죽인 백제에 대한 복수심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변품이 이끄는 신라군의 남하 소식에 [[백제]]도 병력을 모아 신라군의 진격로로 진군했다. 그리고 양 측의 군대가 격돌하게 되었고, 해론은 장수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고 칼을 쥔 채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예전에 내 아버지께서 여기서 숨을 거두셨는데, 나도 지금 여기서 백제인과 싸우게 되었으니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 昔吾父殞身於此 我今亦與百濟人戰於此 是我死日也. >----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888&ref=y&cid=49628&categoryId=49628|제47권 <열전> 제7 -해론]]-''' 적진으로 뛰어들어간 해론은 백제군 여럿을 쳐죽이며 아버지 찬덕과 같은 용맹함을 과시했으나 결국 백제군에게 둘러싸여 전사하고 말았다. 해론의 용맹함에 힘입어 [[신라]]는 다시 가잠성을 되찾는데 성공하게 되었고, [[진평왕]]은 해론의 죽음에 몹시 슬퍼하며 그의 가족들을 보살피라는 명을 내렸다. 신라인들도 해론의 죽음에 슬퍼하며 장가(長歌)[* 장편으로 된 노래, 혹은 길이가 자유로운 시가 문학을 말한다. (출처:위키피디아)]를 지어 그를 기렸다고 한다. >40년(서기 618), 북한산주의 군주 변품(邊品)이 가잠성을 되찾고자 병사를 일으켜 백제와 싸웠다. 해론(奚論)이 종군하여 적과 마주쳐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해론은 찬덕의 아들이다. >四十年 北漢山州軍主邊品 謀復椵岑城 發兵與百濟戰 奚論從軍赴敵力戰 死之 論 讚德之子也 >----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0&cid=49625&categoryId=49798|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평왕]]-''' ---- >19년(서기 618), 신라의 장군 변품(邊品) 등이 와서 가잠성을 공격하여 성을 다시 빼앗아갔다. 이때 해론(奚論)이 전사하였다. >十九年 新羅將軍邊品等 來攻椵岑城 復之 奚論戰死 >----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0&cid=49625&categoryId=49798|제27권 <백제본기> 제5 -무왕]]-''' === 3차 공방전 === 618년의 전투에서 가잠성을 빼앗긴 [[백제]]는 623년 신라의 늑노현(勒弩縣)[* 현재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만약 가잠성이 충청북도 괴산군 군자산성이라고 가정하면 가잠성 전투의 전초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을, 624년에는 또다시 대군을 일으켜 신라의 서부전선을 공격했다. 그리고 628년에 요충지인 가잠성에 병사를 보내어 공격했으며, [[진평왕]]은 그 소식에 병력을 보내어 가잠성을 구원토록 했다. 1차 공방전 때와는 달리 구원군들이 제몫을 한 듯, 가잠성을 백제로부터 방어해 내는데 성공했다. >50년(서기 628) 봄 2월,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자 임금이 병사를 내어 쳐부수었다. >五十年 春二月 百濟圍椵岑城 王出師擊破之 >----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0&cid=49625&categoryId=49798|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평왕]]-''' ---- >29년(서기 628) 봄 2월, 병사를 보내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二十九年 春二月 遣兵攻新羅椵岑城 不克而還. >----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0&cid=49625&categoryId=49798|제27권 <백제본기> 제5 -무왕]]-''' ==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 [[KBS]]의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4화에 1차 가잠성 전투가 등장한다. 전체적인 진행은 사서의 기록을 어느 정도 따라가고 있지만 각색된 부분도 상당하다. 일단 [[길달]]과 배신한 귀문 일당이 백제군과 내통했으며 소년이었던 김유신이 단독으로 출정했다는 내용이 첨가되었고 사서에서 진평왕의 명을 받고도 3주의 성주들이 미적거리면서 출정하지 않은 것을 드라마에서는 인간 말종으로 등장하는 [[김국반|국반 갈문왕]]에게 오롯이 그 책임을 넘기고 있다. [[선덕여왕|덕만공주]]와의 국혼을 대가로 자신이 직접 서라벌의 구원군을 이끌었지만 자신에게 반발하는 장수들을 누르고자 진군을 차일피일 미루고 진격을 주청하는 장수들을 다그쳤으며 주색잡기로 시간만 잡아 먹다가 끌내는 서라벌로 복귀해 버렸다. 이 때문에 가잠성의 군민(軍民)들은 구원병 없이 겨우 파상 공세는 막았으나 길달 휘하의 계략으로 곡창이 불타버리면서 성은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마지막 파상공세에서 [[김유신(대왕의 꿈)|김유신]]과 [[비형랑#s-5.1]]이 가잠성 내 아이들을 빼내는 동안에 성주 찬덕이 병사들과 분전을 벌이며 막아내었고, 결국 패배에 이르자 찬덕은 설화에서와 같이 나무에 머리를 들이받아 자결했고[* 드라마상에서 백제군을 지휘하던 인물인 '계루'도 찬덕의 최후에 경탄을 금치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잠성은 백제군에 함락되었다. * MBC 드라마 <[[계백]]> 10회에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518655|가잠성에서의 전투]]를 다루고 있으나 실제 역사에는 나오지 않은 가상의 전투다. * 한국컨텐츠닷컴에는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Main.do?cp_code=cp0607&print=Y|우리나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이라는 컨텐츠가 있는데 여기에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3&cp_code=cp0607&index_id=cp06070439&content_id=cp060704390001&search_left_menu=2|제 15화,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3&cp_code=cp0607&index_id=cp06070440&content_id=cp060704400001&search_left_menu=2|제 16화 처절한 가잠성 최후의 날]]이라는 글이 있다. 당연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을 차용한 [[소설]]에 가깝다. 따라서 위의 기록 그대로를 믿어선 곤란하다. [[분류:한국사/전투]][[분류:공성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