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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푸스 프레더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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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지 3세의 아들이자, 조지 5세의 왕비인 테크의 메리의 외조부이다.
2. 작위[편집]
- 아돌푸스 왕자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Adolphus (1774년 2월 24일 ~ 1801년 11월 24일)
- 케임브리지 공작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Cambridge (1801년 11월 24일 ~ 1850년 7월 8일)
3. 생애[편집]
1774년 조지 3세의 7남으로 태어났다. 성장 후 형들과 괴팅겐 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프랑스 혁명 전쟁 기간의 제1차 대프랑스 동맹전쟁의 하노버 군에서 경력을 시작하였다. 이후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강화한 후 하노버를 합병하자 영국으로 돌아왔다.
1803년 나폴레옹이 하노버 왕국을 멸망시키자, 많은 하노버 왕국의 군인들이 생계를 이유로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를 KGL(King's German Legion)이라 하였는데 아돌푸스는 이 연대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1813년에 육군원수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영국이 하노버를 되찾자 1816년부터 1837년까지 부왕으로서 하노버 왕국을 대리 통치했다.
1817년 당시 왕태자였던 장남 조지 4세의 외동딸이자 후계자인 샬럿 공주가 아이를 낳다 요절했다. 게다가 당시 조지 4세의 결혼은 이미 파탄나 있었기 때문에 조지 4세의 가계로는 다시 후계자를 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상황이 이리 되자 조지 3세의 아들들 중 2남 요크와 올버니의 공작 프레더릭, 3남 클래런스 공작 윌리엄, 4남 켄트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5남 컴벌랜드 공작 어니스트, 6남 서식스 공작 오거스터스[1] , 7남인 본인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이 5명의 아들에게 장차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를 낳을 의무가 주어지게 되었다.
이 중 2남 프레더릭 왕자는 자식 없이 큰형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제외되었다. 3남 윌리엄은 자식이 11명이나 있었으나 애들레이드 왕비 사이에서 둔 적자녀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자였고, 적자였던 자녀들마저 사산되거나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2]
그리하여 아돌푸스도 1818년 44세의 나이에 헤센카셀의 아우구스타와 결혼하여, 1819년 아들 조지를 얻었으나, 이미 형들이 차례로 자식을 보는 바람에 순위에서는 밀리게 되었다. 결국 형들을 거쳐 조카 빅토리아가 즉위하게 되었다.
1837년 빅토리아가 여왕으로 즉위하여 살리카법에 따라 하노버 왕국과의 동군연합이 해소되었으며, 형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하노버 왕에 즉위함에 따라 가족을 데리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1850년 사망하여 세인트 앤 교회에 묻혔으나, 1930년 외손녀인 메리 왕비의 결정으로 윈저 성 내의 세인트 조지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4.2. 자녀[편집]
5. 여담[편집]
- 캐나다 빅토리아 섬에 있는 케임브리지 베이의 이름은 그의 작위를 따서 명명된 것이다.
-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가 그의 외외증손자이다.
- 드라마 빅토리아 시즌1 초반에 그의 아들 조지 케임브리지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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