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변경문서 보기수정 내역 강홍식 (버전 비교) ||<-2> '''{{{#FFF {{{+1 강홍식}}}[br]姜弘植 | Kang Hong-sik}}}'''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배우 강홍식.jpg|width=100%]]}}} || || '''예명''' ||진훈 (秦勳) || ||<|2> '''출생''' ||[[1902년]] [[12월 9일]] || ||[[평안남도]] [[평양부]] || ||<|2> '''사망''' ||[[1971년]] [[10월 9일]] (향년 68세)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학력''' ||[[광성고등학교(서울)|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2 (전학)}}}[br]다이조 중학교 {{{-2 (졸업)}}} || || '''가족''' ||전부인 [[전옥]][br]자녀 [[강효실]], 강효선[* 배우 전옥과 결혼 중에 낳은 자녀이다.][br]외손녀 최현숙, 최예숙, 최연숙[br]외손자 [[최민수]] || || '''데뷔''' ||[[1925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 때부터 활동한 월북 배우이자 영화감독, 가수로, 배우 활동 당시 '진훈(秦薰)'이란 예명을 썼다. 배우 [[전옥]]의 첫 남편이자 [[강효실]], 강효선 남매의 부친, 그리고 [[최민수]]의 외조부이다. == 생애 == 1902년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태어나 [[광성고등학교(서울)|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2학년이던 1917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다이조 중학교를 4학년까지 다녔다. 이후 성악가가 되려고 도쿄 오페라단에 들어가서 [[이시이 바쿠]]에게 춤과 노래를 배워 테너로서 하이 C까지 올리는 탁월한 재능으로 가수가 됐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대신 1921년 닛카츠로 들어가 야마모토 가이치(1877~1939)에게 연기를 배워 배우로 전업하여 1925년 <쌍옥루>를 시초로 '진훈'이란 가명을 쓰며 은막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1927년 귀국 후 시인 [[심훈]]이 감독한 <[[먼동이 틀 때]]>에서 주연으로 활약하여 박수를 받았고, 뒤이어 취성좌에 들어가 연극 무대에도 손을 벌렸다. 그는 조선연극사로 옮겨 무대감독까지 맡기도 했다. 다른 한편 <처녀총각>, <조선타령> 같은 노래들을 불러 가수로서도 나름 활약했다. 1933년에는 부인 전옥과 함께 조선연극사를 나간 뒤 빅터레코드로 옮긴 바 있다. 1936년에는 심훈이 자신의 소설 작품 <상록수>를 영화화하면서 그를 캐스팅했으나 심훈이 사망하면서 이는 무산됐고, 일제 말이던 1941년에 <복지만리>를 통해 영화배우로 본격 컴백하기도 했다. 1945년 8.15 해방을 전후해 평양에 머물면서 1947년 국립영화촬영소(현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창립 후 연출부장을 맡아 기록영화 <38선>을 연출하고 1948년 북조선인민위원회 문화선전국 극장관리처 산하의 '시나리오 창작위원회' 위원까지 도맡았다. 1949년 북한 최초의 극영화 <내 고향>을 연출을 맡고 6.25 전쟁 중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의 각본을 쓰는가 하면, 1956년 <바다는 부른다>에서 배우를 다시 맡기도 했다. 1960년대까지 <항쟁의 서곡(1960)>, <청년작업반장(1962)> 등을 만들었지만 1960년대 후반 들어 숙청당했고, 1971년에 사망했다. 2011년에 탈북 무용인 김영순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는 요덕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증언했으며, 이와는 별개로 그가 죽고 1970년대 초반경에 북한 정부에 의해 복권됐다. 자식들 중 아들 강효선은 북한에서 배우로 활동하다가 피바다가극단 부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딸 [[강효실]]은 한국에서 배우로 활발히 활동했다. == 작품 목록 == * 월북 전 * 쌍옥루 (1925) * [[이수일과 심순애/영화#장한몽(1926)|장한몽]] (1926) - 조연 * 산채왕 (1926) - 조연 * 먼동이 틀 때 (1927) - 주연 * 집없는 천사 (1941) - 주연(안인규 역) * 복지만리 (1941) - 주연 * 망루의 결사대 (1943) - 주연(김 순사 역) * [[거경전]] (1944) - 주연(하루카와 포수 역) * 월북 후 * 내 고향 (1949) - 연출 *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 (1950) - 연출 / 각본 * 비행기사냥군조 (1953) - 각본 * 바다는 부른다 (1956) - 주연 * 끝나지 않은 전투 (1957) - 주연(박사 역) * 애정 (1959) - 연출 * 행복한 거리 (1959) - 연출 * 붉은 신호탄 (1960) - 연출 * 항쟁의 서곡 (1960) - 연출 * 청년작업반장 (1962) - 연출 * 최학신의 일가 (1967) - 리차드 역 == 참고/관련 자료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4611|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항목]] * [[https://brunch.co.kr/@sangeonhan/8|한상언의 브런치 게시글]] *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K/00160|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자료]] * 강홍식 傳 : 북한최초의 예술영화 <내 고향>의 연출자 - 한상언 저. 한상언영화연구소. 2019. [각주] [[분류:북한 남배우]][[분류:평양시 출신 인물]][[분류:월북한 인물]][[분류:1902년 출생]][[분류:1925년 데뷔]][[분류:1971년 사망]]||<-2> '''{{{#FFF {{{+1 강홍식}}}[br]姜弘植 | Kang Hong-sik}}}'''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배우 강홍식.jpg|width=100%]]}}} || || '''예명''' ||진훈 (秦勳) || ||<|2> '''출생''' ||[[1902년]] [[12월 9일]] || ||[[평안남도]] [[평양부]] || ||<|2> '''사망''' ||[[1971년]] [[10월 9일]] (향년 69세)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학력''' ||[[광성고등학교(서울)|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2 (전학)}}}[br]다이조 중학교 {{{-2 (졸업)}}} || || '''가족''' ||전부인 [[전옥]][br]자녀 [[강효실]], 강효선[* 배우 전옥과 결혼 중에 낳은 자녀이다.][br]외손녀 최현숙, 최예숙, 최연숙[br]외손자 [[최민수]] || || '''데뷔''' ||[[1925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 때부터 활동한 월북 배우이자 영화감독, 가수로, 배우 활동 당시 '진훈(秦薰)'이란 예명을 썼다. 배우 [[전옥]]의 첫 남편이자 [[강효실]], 강효선 남매의 부친, 그리고 [[최민수]]의 외조부이다. == 생애 == 1902년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태어나 [[광성고등학교(서울)|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2학년이던 1917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다이조 중학교를 4학년까지 다녔다. 이후 성악가가 되려고 도쿄 오페라단에 들어가서 [[이시이 바쿠]]에게 춤과 노래를 배워 테너로서 하이 C까지 올리는 탁월한 재능으로 가수가 됐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대신 1921년 닛카츠로 들어가 야마모토 가이치(1877~1939)에게 연기를 배워 배우로 전업하여 1925년 <쌍옥루>를 시초로 '진훈'이란 가명을 쓰며 은막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1927년 귀국 후 시인 [[심훈]]이 감독한 <[[먼동이 틀 때]]>에서 주연으로 활약하여 박수를 받았고, 뒤이어 취성좌에 들어가 연극 무대에도 손을 벌렸다. 그는 조선연극사로 옮겨 무대감독까지 맡기도 했다. 다른 한편 <처녀총각>, <조선타령> 같은 노래들을 불러 가수로서도 나름 활약했다. 1933년에는 부인 전옥과 함께 조선연극사를 나간 뒤 빅터레코드로 옮긴 바 있다. 1936년에는 심훈이 자신의 소설 작품 <상록수>를 영화화하면서 그를 캐스팅했으나 심훈이 사망하면서 이는 무산됐고, 일제 말이던 1941년에 <복지만리>를 통해 영화배우로 본격 컴백하기도 했다. 1945년 8.15 해방을 전후해 평양에 머물면서 1947년 국립영화촬영소(현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창립 후 연출부장을 맡아 기록영화 <38선>을 연출하고 1948년 북조선인민위원회 문화선전국 극장관리처 산하의 '시나리오 창작위원회' 위원까지 도맡았다. 1949년 북한 최초의 극영화 <내 고향>을 연출을 맡고 6.25 전쟁 중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의 각본을 쓰는가 하면, 1956년 <바다는 부른다>에서 배우를 다시 맡기도 했다. 1960년대까지 <항쟁의 서곡(1960)>, <청년작업반장(1962)> 등을 만들었지만 1960년대 후반 들어 숙청당했고, 1971년에 사망했다. 2011년에 탈북 무용인 김영순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는 요덕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증언했으며, 이와는 별개로 그가 죽고 1970년대 초반경에 북한 정부에 의해 복권됐다. 자식들 중 아들 강효선은 북한에서 배우로 활동하다가 피바다가극단 부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딸 [[강효실]]은 한국에서 배우로 활발히 활동했다. == 작품 목록 == * 월북 전 * 쌍옥루 (1925) * [[이수일과 심순애/영화#장한몽(1926)|장한몽]] (1926) - 조연 * 산채왕 (1926) - 조연 * 먼동이 틀 때 (1927) - 주연 * 집없는 천사 (1941) - 주연(안인규 역) * 복지만리 (1941) - 주연 * 망루의 결사대 (1943) - 주연(김 순사 역) * [[거경전]] (1944) - 주연(하루카와 포수 역) * 월북 후 * 내 고향 (1949) - 연출 *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 (1950) - 연출 / 각본 * 비행기사냥군조 (1953) - 각본 * 바다는 부른다 (1956) - 주연 * 끝나지 않은 전투 (1957) - 주연(박사 역) * 애정 (1959) - 연출 * 행복한 거리 (1959) - 연출 * 붉은 신호탄 (1960) - 연출 * 항쟁의 서곡 (1960) - 연출 * 청년작업반장 (1962) - 연출 * 최학신의 일가 (1967) - 리차드 역 == 참고/관련 자료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4611|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항목]] * [[https://brunch.co.kr/@sangeonhan/8|한상언의 브런치 게시글]] *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K/00160|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자료]] * 강홍식 傳 : 북한최초의 예술영화 <내 고향>의 연출자 - 한상언 저. 한상언영화연구소. 2019. [각주] [[분류:북한 남배우]][[분류:평양시 출신 인물]][[분류:월북한 인물]][[분류:1902년 출생]][[분류:1925년 데뷔]][[분류:1971년 사망]]Loading...